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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9.08 [세상읽기]‘그린뉴딜’은 누구의 말인가

[경향신문 '세상읽기']에서 가져온 글

 

언어는 중요하다. 누구의 언어로 말하는가도 참 중요하다. 

소수 엘리트나 지배권력의 언어로 민중 또는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하는 모습은 그래서 위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언어를 들여다보는 눈이 그래서 필요하다.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럴싸한 가르치려는 언어는 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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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그린뉴딜’은 누구의 말인가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2020-09-08

 

‘그린뉴딜’은 어려운 말이다. ‘그린’이야 직관적으로 이해된다고 해도, ‘뉴딜’은 암호다. 설명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그 말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맥락을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그냥 새로운 정책패키지의 브랜드에 그칠 뿐이다. 그럴 때 혼동과 위험이 발생한다. 9월4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 사업 추진을 위해 ‘뉴딜펀드’를 포함하는 대규모 금융지원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동안 환경운동 내의 제안자들은 그린뉴딜을 ‘기후위기를 막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 대전환’ 프로젝트라고 설명해왔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정부의 그린뉴딜은 지구환경을 파괴한 성장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오히려 더 촉진하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디지털, 수소전기자동차, 재생에너지 산업 지원을 위해 170조원의 금융투자 지원과, 여기에 20조원의 뉴딜펀드까지 조성해서 투자자들의 수익률과 원금 보장을 약속한다. 한마디로 녹색으로 분칠한 ‘카지노 자본주의’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그린뉴딜이 왜 이렇게 된 걸까? 2008년 오바마 정부의 그린뉴딜이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론으로 처음 수입되었을 때만 해도 국내 환경단체들은 ‘가짜 녹색’의 가면을 벗겨내고 ‘녹색경제’의 기만성을 폭로했다. 당시 금융시장 붕괴에서 위로부터 도입이 추진된 그린뉴딜은 새로운 녹색시장을 열며 위기의 돌파구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자본은 기후시장을 통해 디지털, 에너지, 바이오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고자 한다. 달라진 것은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계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라면 이런 뉴딜에 맞서 앞장서서 싸웠을 사람들이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처음 도입될 때부터 이 개념은 위험을 노정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의 급진적인 기후운동에서 상징을 가져왔지만, 내용적으로는 정부, 기업, 투자자들이 주도하는 EU의 보수적이고 친시장적인 그린딜에 가까웠다. 친정부 단체와 여당이 그린뉴딜 담론을 주도하면서,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요구와 방향에 대한 논의는 실종되고, ‘탈탄소론’에 치우친 기후관리와 기술정책담론으로 흡수되었다. 가장 중요했던 불평등 문제도 마치 노동자를 산업 분야 좌초 자산의 일부인 양, 쓸모없게 된 노동의 처리 문제처럼 다뤄졌다. 지금 한국판 뉴딜에서 노동전환 대책은 전무하다. 전환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분명했지만, ‘규모’와 ‘속도’의 조급함 속에, 철학과 방향을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린뉴딜은 노동자 민중의 말이 아니었다.

 

미국의 노동자계급에 뉴딜이란 말은 1930년대의 기억으로부터 정치적 상상력을 불러온다. 그것은 자본과 노동이 한판 세게 붙었던 시대의 기억이다. 루스벨트 시대의 뉴딜은 어떤 훌륭한 대통령이 노동자들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였다. 노동조합운동, 실업자운동, 흑인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광범위한 민중연대가 자본가를 밀어붙여 새로운 협약(new deal)을 만들어내고 노동자 권리를 쟁취한 그 역사의 힘이, 뉴딜이란 말 속에 담겼다. 특히 금융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뉴딜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때 월가의 금융가들은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새로운 협약’을 요구하는 미국 민중들은 이겨봤던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뉴딜’이란 말은 그런 힘을 갖지 못한다. 역사성이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말은 누구에게 힘을 주는가? 관료와 전문가들은 늘 대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정책용어로 선호한다. 그런 말은 지배자들에겐 용이하게 쓰이지만 저항자들에겐 힘을 박탈한다. 자기가 모르는 말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싸우기는 힘든 법이다. 그린뉴딜은 점점 더 우리에게 상상력을 주는 말이 아니라 가로막는 말이 되어간다. 그래도 이 말을 계속 써야 할까? 그린뉴딜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지구 곳곳에서 기후정의운동은 번져가고 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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