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가 <아픔의 기록>에 쓴 '길 안내'
자꾸 읽어 보면 시라는 게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대목이 자꾸 끌린다.
"시는 사실(事實) 앞에서 무력하다. 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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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기록>(존 버거) 시 소묘 사진 1956-1996
_ 존 버거
길 안내
열두 살 때부터 시를 썼다, 무엇이든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을 때면. 시는 무력감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시의 힘은 무력감에서 나온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일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주변의 모든 사실과 빠른 속도로 타협한다. 몸과 기계는 나아갈 길을 찾는 눈을 따른다.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자유롭다는 우리의 느낌은 결정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극히 짧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리고 어떤 저항이나 지연이 있게 되면 우리는 이를 비스듬히 비껴 가는 반동(反動)의 계기로 이용한다.
모터사이클을 몰 때, 삶을 계속 이어 가고자 한다면 거기에 있는 것 이외에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사실(事實) 앞에서 무력하다. 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시를 쓰는 동안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인다. 옷, 벗어 던진 신발, 그리고 머리 빗는 솔처럼, 시는 거기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 앞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세기 전 스페인 북서쪽에 있는 갈리시아인들의 마을 베탄소스(Betanzos) 이곳저곳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플로리다, 쿠바, 중앙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났다. 그래서 베탄소스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내가 그리는 그림에다 계속 이 단어를 써 넣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사람은 바람을 누비듯 앞으로 나아가고, 시는 그 반대 방향에서 다가온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지나칠 때 둘 사이에 때로 함께 나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베탄소스와 같은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똑같은 연민의 마음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내 사랑이, 똑같은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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