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전환연구소> 인터뷰 글을 퍼왔다.
곰곰이 읽어볼 만하다 싶고, 녹색당원들이 이런 일을 벌여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녹색이 일자리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인드라망에서도 고민해 볼 만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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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농촌으로 갑시다!"
- 인터뷰어 : 박이상(녹색전환연구소 편집위원)
- 인터뷰이 : 전제언(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수확의 계절 가을이 왔다. 각 지역에서 추수가 한창이다. 유독 폭염이 심했던 올해는 일조량의 증가로 쌀농사가 대풍이다. 하지만 풍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사정은 더욱 열악해졌다. 생산량이 대폭 증가하자 이는 쌀값 하락으로 이어졌다. 쌀 80kg 한 가마니 가격이 30년 전 값으로 뚝 떨어졌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급격한 가격 변동은 그 대상의 존재 기반을 무너트릴 수도 있는 위험한 요소 중 하나다. 농산물 가격을 형성하는 곳은 유통시장이지만 한 국가의 식량주권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농업이다. 단순히 자본논리에 의해서만 농업 경제력이 좌우되는 현 상황으로는 국민들의 식량주권을 지키기 어렵다.
이런 현실 속에서 농업 유통에 대한 새로운 꿈을 안고 사업을 시작한 이들이 있다. ‘생생농업유통’은 농촌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도시로 판매하는 유통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20대 청년들이 만들어서 청년기업으로 유명하기도 한 이곳은 최근엔 ‘소녀방앗간’이라고 하는 식당을 창업하고 전국으로 매장을 넓혀가며 사업을 확장 중이다. 지난 10월 1일 ‘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전제언씨를 만나 그들의 사업과 농촌에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전제언
- ‘생생농업유통’은 어떤 곳인가?
우리는 농산물 유통업체다. 지역의 농산물을 사서 도시로 팔고 있다. ‘생생농업유통’이란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한 것은 2012년부터지만 이 이름을 달기 전에도 이미 농산물 유통사업을 하고 있었다. 사장인 김가영 대표는 10년 전부터 농산물유통을 시작해왔다. 나는 여기서 일한지 5년 정도 되었고 가장 오래된 직원이다.
- 농산물 유통이 흔한 일은 아닌데 원래 농사를 짓거나 농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건가?
그렇진 않다.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 출신이었고 농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에서 출발했다.농사의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배워가는 중이다. 비록 농사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기존의 마을 주민들과 다른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 느껴지는 감수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산나물, 고춧가루, 양파, 마늘... 모든 농산물에는 농산물을 키운 어르신들의 삶이 담겨 있고 그 지역의 문화가 녹아 있다. 이런 농산물을 유통하는 일은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유통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이 우리 사업의 방향을 결정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농산물을 수확하는 현장에 가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 있다. 그런 지역의 고유한 느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비자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다면 농산물의 가치도 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단순히 농산물만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농산물을 통해 지역의 가치를 도시로 이어주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역에서 받은 인상을 이미지와 문구로 표현한 천막
- 20살부터 농산물 유통업을 시작한 김가영 대표의 이야기는 청년 사업의 성공담으로 언론을 통해 많이 소개가 되었다. ‘생생농업유통’도 어느덧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것 같다. 현재의 회사 규모는 어떤지 궁금하다.
우리가 유통하는 농산물 규모는 해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대략적으로 연간 쌀은 10~15톤, 된장은 3~4톤, 산나물은 1톤 정도 유통한다. ‘소녀방앗간’이 생긴 이후로는 여기 식재료를 주로 납품한다. ‘소녀방앗간’이 한식당이다 보니 한식재료가 다양하게 필요하고 우리가 대는 품목도 다양하다. 품목 관계없이 다 하면 연간 50톤 정도 되는 것 같다.
직원은 총 3명이다. 김가영 대표와 나와 또 다른 직원이 한명 더 있다. 함께 하던 남자직원이 한명 더 있었는데 지금은 업무 상 ‘소녀방앗간’ 소속으로 옮겼다. ‘소녀방앗간’ 직원들은 30여명이다. 이밖에 우리에게 납품하거나 같이 작업하는 어르신은 6~70명 정도 된다.
곡성에서 함께 일했던 김가영, 전제언, 현동환
- ‘소녀방앗간’과 ‘생생농업유통’은 이름도 다르고 대표도 달라서 처음에는 별개의 회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두 회사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 같다.
두 개 회사가 각각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사업은 같이 굴러간다고 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소녀방앗간’에 들어가는 대다수의 식재료를 ‘생생농업유통’이 납품하고 직원들도 함께 유기적으로 일하고 있다. 나도 서울에 올라오면 ‘소녀방앗간’ 건물의 직원 숙소를 사용한다. 서로 일하는 지역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다는 정도가 차이 날뿐 같은 직원들이라고 생각한다. ‘생생농업유통’의 김가영 대표는 ‘소녀방앗간’ 이사로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소녀방앗간 1호점 오프닝 전시회 포스터
- 그럼 ‘생생농업유통’ 외에 ‘소녀방앗간’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김가영 대표가 처음 농산물 유통업을 시작했을 때 취급했던 품목은 상추였다. 상회, 음식점 등 여러 판매처에 상추를 대기 시작했는데 계속 변수가 생기는 거다. 농산물 유통은 온전히 우리 판단력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수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날씨서부터, 거래처가 도산하거나, 우리와 관계가 틀어져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는다거나,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농가와 계약한 주문량을 지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농가와의 약속을 깨지 않고 우리 사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 소비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부분의 농가는 고춧가루, 파, 마늘, 대파 등 우리가 한식을 만들어 먹을 때 쓰는 재료들을 재배한다. 농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농산물을 이용한 사업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한식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가 주로 거래하는 생산지에서 많이 나는 농산물을 ‘소녀방앗간’의 메뉴로 만들었다.
할머니들이 나물하는 하루 일상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전달한 전시회
- 단순히 농산물 유통에 그치지 않고 한식당 사업으로 확장한 것은 도전적이고 색다른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 그럼 기존의 농산물유통업체와 ‘생생농업유통’의 가장 큰 차이점이 궁금하다.
우리가 기존 방식을 잘 모른다는 거? 모르다 보니 생산자나 소비자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게 우리 사업에 힌트가 되었다. 물론 기존의 업체를 통해 배울 것도 많다. 지금도 계속 배우는 중이다.
보통 유통업은 중간에서 이윤만 많이 남기고 착취하고 농민들과 소비자를 단절시키는 역할이라고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중간 역할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농민들은 농산물을 팔면 그 시점부터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가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그 중간 상황을 떠 앉는 건 유통업자의 몫이다.
예를 들어, 배추 10톤을 떼 온다 치자. 소비자는 이걸 한 번에 다 살 수 없다. 1톤씩 매월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면 10개월 간 다 소진할 수 있다. 이럴 때 중간자 역할이 분명 있다. 이런 필요에 의한 역할이 유통업에게 있다는 걸 알지 못하면, 중간에서 폭리만 취하는 나쁜 놈이라 생각하기가 쉽다.
소녀방앗간 입구마다 소개된 나물과 할머니들의 이야기
우리가 기존 업체와 또 다른 점은 서로의 상황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거다. ‘소녀방앗간’에서는 산나물 재배하는 어르신, 고춧가루 빻는 어르신, 간장 담그는 어르신... 농산물을 만든 어르신들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한다. 사실 식당에서 농작물 작황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식당에 납품할 농산물 수량과 품질만 잘 맞추면 되는 거지. 이건 식당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서빙 잘하고 요리만 잘하면 되는 거지 농산물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지은 농산물을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농사지을 때도 더 정성을 쏟게 된다.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들 주려고 재배한 건 얼마나 알찬가. 그리고 이 농산물이 어떻게 생산됐으며 그 작은 열매 하나에 수십년의 노하우와 수고가 들어갔는지 알게 된다면, 요리할 때도 더 공들여 요리를 하게 된다. 이렇게 농산물을 따라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게 되는 일이 농촌과 도시가 연결되는 지점일 수 있다고 본다.
이른 새벽 어르신들과의 나물수확
-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농산물 유통을 단순히 자본의 이동이 아닌 문화와 가치의 이동으로 본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과도 비슷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농민과 만나는 방식은 아마 생협과 비슷할 거다. 생협도 농산물에 대해서 농민들과 계약 재배를 한다고 알고 있다. 우리도 사전에 가격을 책정하고 계약 재배를 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으로 크기 위해서는 규모도 훨씬 커져야 하고 사람도 더 많이 함께 해야 하는 등 제약사항이 많은 것 같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중이다.
- 개인적인 삶의 이력도 궁금하다. 농업에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나?
전혀 아니었다. 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정작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문제가 더 크다고 느끼고 있었다. 내 안의 많은 불만들이 다 모난 성격 때문인 건가 싶어서. 그러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나의 그런 불만들이 내 개인의 탓이 아닌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부장제, 여성억압, 나이억압 등 여러 가지 억압적인 문제들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라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권력을 가져서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그런 큰 야망이 있는 건 아니었고, 그저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도 그런 기대로 시작했다.
곡성에서 도전한 무농약 무퇴비 무비닐 농사 중, 볏짚으로 두둑을 멀칭
첫 근무지는 ‘희망청’이란 곳이었다. 당시엔 청년이 사회적 화두가 되어 많은 얘기들이 나오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정작 청년 당사자들이 뭐라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별로 없어서 그들 스스로 이야기하고 액션을 취하는 게 필요하다 싶어 만들어진 곳이어서 청년 문화사업 관련된 일을 주로 했었다.
그곳에서 “마포는 대학”처럼 마을과 지역을 바탕으로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와 주변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태어난 이후 줄곧 도시에서 살았음에도 도시가 내 동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다. 출퇴근 시간의 지옥철을 벗어나 내가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청’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 그럼 농산물 유통을 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생생농업유통’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처음엔 전주의 사회적기업 ‘이음’에 들어갔다. 전주는 소도시여서 차 타고 10분 정도 나가면 다 논밭일 정도로 자연과 가깝고 문화적 인프라가 많아서 살기 좋았다. 그곳에서 하는 일이 농촌에서 하는 문화 사업과 마을 사업이어서 인근 지역을 차로 많이 돌아다녔다. 에어컨도 안 나오는 달달거리는 트럭을 타고 산이며 하늘이며 구름이며 음미하면서 달려가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내가 그동안 본 것 중에 가장 큰 하늘을 거기서 봤다. 그렇게 전주 생활을 즐기다가 김가영 대표가 제안해서 함께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 김가영 대표와는 어떻게 같이 사업을 하게 되었나.
대학 때 같은 과 친구였다. 그땐 별로 안 친했는데 내가 전주에 내려와 농촌에서 일하면서 친해졌다. 김대표는 대학시절에도 지리산 농산물 유통업을 하느라 바빴다. 나는 대학 때 탈춤 동아리를 열심히 했는데, 한참 탈춤 연습하다가 수업에 늦어서 교실 맨 뒤에 앉아 숨 돌리고 있으면 누가 조용히 들어와 내 옆에 앉는 거다. 그래서 쳐다보면 김대표였다. 그러다 곧 전화가 오면 다시 조용히 사라지고... 그런 모습을 보며 쟤는 뭐지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김대표도 당시엔 나를 보며 지하실에서 탈춤이나 추는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음’에서 했던 일이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거였고 그러다 보니 농촌 구석구석을 많이 돌아다녔다. 탈춤 출 때는 탈춤 추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이듯이, 농촌에 사니까 농사 짓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농사도 한번 지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김대표가 전북 완주에서 고추농사를 지어보자고 제안해 왔다. 돌부터 골라내야 하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주변에서는 어떻게 농사 짓는 지 잘 보고 눈치껏 따라하면서 고추농사를 지었다. 농사짓는 과정 자체가 다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어서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김대표와 함께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시작은 고춧가루였다.
예천 고추농가와 계약 재배한 고추를 수집하는 날, 5톤 트럭과 트렉터 동원
- 문화기획 일을 하다가 농업유통으로 바꾼 셈이다. 청송에 있을 때 산나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지의 메리트’라는 잡지도 만들었다고 들었다. 지역의 문화생산에 계속 참여하고 있었던 셈인데 문화기획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앞으로도 유통업을 계속 할 생각인지 궁금하다.
사실 지금 딱 유통업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지금 하는 유통업은 문화기획이 함께 들어가 있다고 본다. 물론 농가와 만나서 가격 흥정하고 물건 받아와서 납품하고, 기본적으로 하는 유통에 필요한 업무들이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농산물로 다양한 문화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 작년에는 정부 지원금으로 청송 지역 단체들과 협력하여 “청송창조지역사업단”을 꾸리고 다양한 지역 문화 사업도 벌였다. ‘오지의 메리트’는 그 일부였다.
예를 들어 ‘소녀방앗간’에 산나물을 따는 어르신들의 하루를 사진과 문구로 전시를 한 적 있다. 유통업자로서 일하면서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고, 그 이야기와 가치를 전하기 위한 문화적 노력의 결과가 전시로 나온 거였다.
우리가 유통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 사업방식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도시에서 살면서 길러진 감성과 습성을 유통업에 접목해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냈다. 지난번엔 농촌에서 간장 담그는 어르신, 쌀 빻는 어르신 등 우리와 같이 작업하는 어르신들을 모셔서 ‘소녀방앗간’ 매장에 가서 밥을 먹었다. 그분들도 내가 따온 나물이, 내가 담근 간장이, 이렇게 밥과 찬으로 나오는 걸 처음 보신 거다. 서울에서 우리 농산물로 이렇게 식당을 하는 구나 알게 되니까 관계가 더 두터워지게 된다.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어르신들을 얘기로만 듣다가 직접 보게 되면서 자신이 요리하는 식재료에 더 믿음이 가게 된다. 그래서 ‘소녀방앗간’ 메뉴판을 보면 각 식재료를 만든 어르신 이름이 들어가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농산물을 매개로 도시와 농촌을 잇는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어쿠스틱 공연과 함께 한 가을, 청송창조지역사업단에서 함께 만들었던 청송별밤축제
- 도시에서 지역으로, 문화기획자에서 유통업자로, 그리고 다시 지역에서 도시로, 유통업자에서 문화기획자로,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삶의 이력이 흥미롭다.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된다. 추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리가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뉴욕에 가자”는 말을 하고 있다. ‘소녀방앗간’ 매장을 뉴욕에 오픈하고 싶은 꿈이 있다. 최근에 제주도에도 매장이 하나 생겼는데 제주도만 해도 우리에게는 외국이나 다름없는 새로운 도시다.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우리의 또 다른 도전이다.
- 만약 뉴욕에 매장을 연다고 하면, 뉴욕까지 한국 농산물을 이송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 소비량과 탄소 배출량이 증가하게 된다. 이런 환경적인 측면으로 뉴욕 진출을 고려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 지역에서 나는 음식물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만 먹는다면,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음식물을 못 먹고 살아야 되는 건가 질문해 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주말농장과도 비슷한데, 주말농장도 자연 속에서 생태적인 삶을 얘기하지만 거기까지 가려고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탄소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농장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농장생활을 직접 접했을 때 농작물에 대한 이해도 생기고 파급력도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도 청송에서 뉴욕으로 식재료를 이동했을 때 드는 비용과 오염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으면서 청송과 한국 농촌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파생되는 효과와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뉴요커가 우리 음식을 먹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와 가까운 지역에서 생태적인 활동을 하고 싶은 꿈을 키울 수도 있다고 본다.
청송창조지역사업단에서 폐교를 청년 지역정착 실험공간으로 꾸밈
-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처럼 농산물 유통을 토대로 도시와 농촌이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전환이 만들어지길 꿈꿔본다. 끝으로 “녹색전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녹색전환은 환경을 생각하는 삶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농촌생활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환경을 생활의 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유럽연합에서는 농사 짓는 사람을 단순히 식량 생산으로 의미화 하는 게 아니라 이 지구의 녹지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자라고 규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지원사업도 보면 이들이 농촌에 살면서 논과 밭을 일구고 나무 심고 환경, 숲을 가꿔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원한다는 개념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농업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녹색전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농촌에 살면서 삶의 전환을 경험했다. 온종일 머리로만 씨름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도시생활에서, 직접 몸을 움직여 땅을 갈고 풀을 베고 농작물을 수확하면서 머리도 더 상쾌해지고 활력이 솟았다. 삶 자체가 건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같이 농촌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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