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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1.29 [한겨레]왜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는가


왜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는가 




신형철의 격주시화(隔週詩話)
_40년 전 시를 지금 여기에서 읽으며
강간(rape)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밤 사냥꾼이면서 아버지이기도 한, 어느 경찰이 있다.
그는 당신과 같은 동네 출신이고 당신의 남자형제들과 자랐으며
어떤 이상(理想)도 갖고 있다.
부츠를 신고 은(銀) 배지를 달고 말 위에서 한 손으로 총을 만질 때의 그는
당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를 알게 되어야만 한다.
그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는 기구에 접근 가능한 사람.
그와 그의 종마(種馬)가 군벌(軍閥)들처럼 쓰레기 사이를 어슬렁댄다.
그의 이상이 공중에 서 있다.
웃음기 없는 입술 사이에서 생겨난, 얼어붙은 구름.

그리하여, 때가 되면, 당신은 그에게 의지해야 한다.
미치광이의 정액이 아직도 허벅지에 끈적이고
정신은 실성한 듯 빙빙 도는데.
당신은 그에게 자백을 해야만 한다, 당신은
당신이 당한 그 범죄에 대해 유죄이므로.

그리고 당신은 그의 푸른 눈이, 당신이 알고 지내 온 그 모든 가족들의 푸른 눈이 
가늘어지면서 번들거리는 것을 본다.
그의 손이 세부사항들을 타이핑한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당신 음성에 실린 격렬한 흥분.

당신은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이제 당신을 안다고 여긴다.
그는 당신의 최악의 순간을 타이프라이터로 적어 내렸고
그것을 서류철에 넣어 보관했다.
그는 안다, 혹은 안다고 여긴다, 당신이 얼마나 많이 상상했는지를.
그는 안다, 혹은 안다고 여긴다, 당신이 무엇을 은밀히 소망했는지를.

그는 당신을 처넣을 수도 있는 기구에 접근 가능한 사람.
만약, 경찰서의 그 역겨운 불빛 속에서
만약, 경찰서의 그 역겨운 불빛 속에서 
당신이 말하는 세부사항들이 고해신부의 초상을 그려내는 것처럼 들린다면
당신은 삼킬 것인가, 모두 부정할 것인가, 거짓말을 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Diving into the wreck, 1973) 수록. 
* 에이드리언 리치 시선집 <문턱 너머 저편>(한지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의 번역이 빼어나지만 달리 읽은 부분도 있어 졸역을 여기에 보탠다.

2012년 3월에 에이드리언 리치가 82살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한국에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쓴 매체는 거의 없었다. 현재 검색되는 것은 다음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여성신문>의 기사뿐이다. “리치는 미국 여성운동에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여성의 권리를 대변하는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해 여성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1970년대 대학들이 여성학과를 개설한 후엔 가장 많이 읽힌 작가가 됐다.” 그러나 한국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훌륭하게 번역된 시선집 <문턱 너머 저편>(2011)이 나온 지도 5년이 넘었지만, 아직 학계 바깥의 독자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960년대 여성운동에 참여하면서 레즈비언 성정체성을 깨닫고 남편과 결별한 후 리치의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데, 이와 더불어 그의 문학도 독자적인 깊이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시집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1973)는 20여권에 이르는 리치의 시집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시집으로 그가 1974년에 전미도서협회상을 수상한 것은 특별한 이유로 인상적인데, 애초 수상을 거부하려던 그는, 함께 후보에 오른 동료 여성 시인들과 공동 명의로 “가부장적 세계에서 그 목소리를 무시당해왔고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의 이름으로” 상을 받겠다는 소감을 발표하고, 상을 수락했다. ‘강간’이라는 시가 이 시집에 수록돼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사건의 관찰자이자 해석자다. 첫 행에서 ‘경찰’을 소개할 때 시인은 대조적인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해서 그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그는 제 자식에게는 ‘아빠’(father)이지만, 다른 여성들에게는 폭력성을 감추고 있는 ‘남성’(prowler)이기도 하다. (‘prowler’는 심야에 거리를 배회하며 절도를 하고 위해를 가하는 이를 뜻하는데, 시선집의 역자는 “먹이를 찾아 헤매 다니는 사냥꾼”이라 풀어 옮겼고, 나는 궁여지책으로 ‘밤 사냥꾼’이라 했다.) 같은 동네 주민이자 오빠/남동생과 함께 자란 사람인데도 ‘당신’이 그 경찰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중성 때문이다. 그때 화자가 불길하게 예언한다. 언젠가 그를 잘 알게 되리라고.

불행하게도 “때”가 왔다. 당신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했다. 알지만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 남자가 근무하는 경찰서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즉각적인 보호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그게 아니다. “당신은 그에게 자백을 해야만 한다.” 자백은 죄를 지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왜 피해자인 당신이 그것을 하고 있는가. 이 기괴한 상황의 아이러니를 리치는 역설의 수사학으로 적발해낸다. “당신은 당신이 당한 그 범죄에 대해 유죄이므로.” (시선집의 역자는 원문의 우회적 표현을 과감히 축약했다. “당신은 강간을 당한 죄를 졌으니까.”)

어떤 말의 종류는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번들거리는” 것은 그가 당신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느낀 게 고통이 아니라 쾌락이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건의 “세부사항”을 듣기 원하고 그것을 포르노그래피처럼 즐긴다. 당신의 고통이 초래한 “격렬한 흥분”(hysteria)조차 그의 쾌락을 위해 소비될 때, 어느새 당신은 무고(誣告)를 행하는 자가 되어 있다. 무고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책임은 이제 당신에게 있고, 당신은 자신의 고통이 진실한 것임을 필사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모든 가족들”을 포함한) 이웃들의 눈이 경찰의 눈을 닮아갈 것임을 예감하며 심리적으로 고립된다.

다음 대구가 이 상황을 요약한다. “당신은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이제 당신을 안다고 여긴다.” 당신이 강간을 “은밀히 소망”하고 “많이 상상”해왔다고 결론지은 그는 이제 당신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 타인을 ‘안다고 여기는’ 태도는 언제나 위험한 것이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는 완전한 폭력이다. 이런 폭력은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에게 권력이 있을 때 발생한다. 당신을 “죽일 수도 있는”(2연) 혹은 “처넣을 수도 있는”(6연) 기구(machinery)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이 그에게는 있다. 이를테면 당신은 무고죄로 감옥에 갈 수도, 정신이상자로 병원에 넣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피해자가 어느새 피의자가 됐다. 실제로도 빈번한 일이었다. 이 시에서 리치는 여러 사례 중 하나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례들의 공통 구조를 추출해낸 것이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이 출간된 것은 1973년이고, 미국에서 최초로 ‘강간피해자보호법’(Rape Shield Law)이 제정된 것은 1974년이다. 수사 도중 피해자의 과거 성경험이 들춰져 무고를 입증하는 증거인 양 다뤄지고는 했는데, 그것이 증거가 될 수도 없고 판결에 영향을 미쳐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 그 법이었다. (우리의 경우 이에 준하는 법률 개정안이 발의 준비 중이다. 즉, 아직은 피해자 보호 장치가 불완전하다는 것. 이상의 내용은 신나리, ‘무고죄, 명예훼손에 발목 잡힐 수 없다’, 격주간 <워커스 23호>)

이제 마지막 연이 남았다. “당신이 말하는 세부사항들이 고해신부의 초상을 그려내는 것처럼 들린다면”이라는 구절은 기묘해 보인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가해자의 얼굴이 고해신부의 얼굴을 닮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세부사항을 말하면서 오히려 죄인이 되어가고 있는 이 상황이 고해신부 앞의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일까. 어떤 식으로 읽건 이 구절이 암담한 것은 이제 ‘강간범’과 ‘경찰’과 ‘고해신부’가 더 이상 구별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 안에서는 ‘강간의 바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당신은 완전히 무력해진다.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고, 거짓말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인가.

제목은 ‘강간’이지만 이 시는 ‘강간 이후’의 상황만을 보고한다. 피해자를 피의자로, 진술을 자백으로 바꿔버리는 남성적 권력의 개입 역시 ‘강간’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메시지를 이렇게 정리해야 할까.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난다.’ 육체적 강간과 정신적 강간, 혹은, 개인적 강간과 사회적 강간. 40년도 더 된 시다. 자신을 희생하며 싸워온 이들 덕분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시 안에는 ‘지금’과 ‘여기’가 있고, 무엇보다도 ‘나’가 있다. 구조가 폭력적일 때 그 구조의 구성원으로 살아온 사람은 아무리 축소해 말해도 결국 ‘구조적 가해자’일 뿐이다. 일단 이 점을 자인하는 부끄러움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으리라.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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