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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21 백의 그림자를 읽고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읽고

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었다.

무엇보다 언어 또는 낱말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고, 그런 생각을 바탕에 둔 듯한 소설 속 연인들의 대화 또한 관계 맺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해주는 듯도 했다.

그림자가 주는 느낌도 독특하고 신선했다. 우리는 저마다의 그림자를 안고, 아니 짊어지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뒷부분에 평론가가 쓴 글은 두루뭉술하게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느낌을 또렷하게 정리해주는 듯하여 부분부분 끄적여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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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_ 자명성의 해체

사람들이 말과 글에서 현실이라는 단어를 무신경하게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 그 말과 글은 현실과 차갑게 무관해진다. 현실과 직면하지 않기 위해 현실이라는 말이 필요했다는 듯이 말이다. 문학의 할 일 중 하나는 우리가 현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명함에 관한 그 잘못된 믿음을 해체하는 일이다.

 

2. 환상_ 불행의 단독성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진다. 앞에서 소설가들은 현실이라는 개념의 자명성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중략)

그러니 이 작가의 환상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라면 상투적인 표현만큼이나 지나치게 유려한 표현도 때로는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결벽증이 낳은 자구책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3. 언어_ 일반화의 폭력

여러분도 이런 신기한 사실을 영락없이 관찰하셨겠지요? 즉 여러분이 예사 말투에서 듣거나 쓸 때는 완전히 분명한 어떤 낱말이, 또 여느 글귀의 빠른 진행 속에 끼여 있을 때는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 낱말이, 그것을 따로 살펴보려고 순환 과정에서 끌어내자마자, 그 일시적 기능에서 벗어나게 한 다음 하나의 뜻을 찾아 주려 들자마자, 마술과도 같이 거추장스러워지고 야릇한 저항을 끌어들여 뜻 매기려는 노력 모두를 좌절시켜 버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폴 발레리, <시와 추상적 사유>에서

 

모든 낱말들에는 때가 묻어 있다는 것, 그래서 시인이라면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런즉 언어 상황의 청소가 먼저 이루어져야 겨우 한 낱말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인용문의 취지다.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언어와 서먹해지는 순간을 겪는다는 것인데, 시인이 아닌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이와 같은 기묘한 체험을 가끔씩 하곤 한다.

 

4. 대화_ 윤리적인 무지

언어의 이런 폭력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중략) 블랑쇼는 글쓰기에서 언어가 근복전으로 세계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깊은 회의를 느꼈지만 말하기의 경우, 혹은 최소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경우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미지의 상대화 관계 맺기를 원한다면 유지해야만 하는 환원할 수 없는 거리는 말하기의 특별한 선물이다."

(중략)

A는 B일까요? 음, 아닐까요? 그렇죠, 역시 그런 것일까요?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대화가 조금 이상해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왜일까, 대화들에 응당 개입하곤 하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 아닌지, 여기에는 독단적인 판단이 없고 그 판단의 강요가 없으며 효율을 위한 과속이 없다. 그 대신 어떤 윤리적인 '거리'가 있다.(중략) 지금까지 우리가 현실의 자명성, 불행의 평범성, 언어의 일반성 등으로 규정해 온 어떤 요소들을 대화 안에 들여놓지 앟기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윤리적인 무지'의 대화라고 부르고 싶다. 세속적인 이해타산에 너무나 밝은 우리들의 대화는 똑똑하게 슬프고, 그런 것들에 무지한 이 인물들의 윤리적인 대화는 어쩐지 무의미해 보이면서 아름답다.


5. 사랑_ 연인들의 공동체

사랑이란 무언잇가, 연인의 가마 모양을 유심히 보면서(34쪽) 그를 유일무이한 단독자로 발견해 내는 일이고, 설사 내가 쇄골이 반듯한 사람을 좋아하더라도 쇄골이 반듯하지 않은 연인에게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39쪽)라고 말해 주면서 그 단독성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절대화하는 일이다. (중략) 블랑쇼는 "연인들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에 있다."(<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고 말한 적이 있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훌륭한 연애소설은 그 자체로 억압적인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서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인데,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간접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충분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두 연인이 보여 주는 어떤 윤리적인 관계의 가능성을 통해 시스템의 비윤리적인 비정함에 항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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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다 더 오래 남는 문장도 상징도 대화도 없는 그런 일회용 소설들, 그러나 이 작품은 다시 읽기를 유도하고 또 견뎌 낸다.이 소설의 문장들은 삶의 터전 바깥으로 비틀비틀 끌려 나가는 사람의 속도로 걸어가고, 이 소설의 상징들은 절반쯤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처럼 처연하게 흔들리며, 이 소설의 대화들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가장 진실해질 때의 그 표정으로 오고 간다. 그런 것들이 절규도 환희도 없이, 훈계도 산파도 없이......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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