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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1.24 야인정신, 들사람 얼 _ 함석헌

김종철 선생이 쓴 글을 읽다가  글에서 언급한 함석헌 선생의 '들사람 얼(야인정신)'을 찾아보았다. 

어쩌면 나를 비롯 대부분이 들을 잊었거나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문명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으니. 몸도 마음(정신)도...

울타리 안에서 야인을 찾으려 하거나 흉내 내려 하면서 더욱 모순 덩어리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몸부림 속에서 울타리 경계까지 가거나 넘거나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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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얼(野人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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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담배


옛날엔 호랑이가 담배를 먹었단다. 그때는 사람과 호랑이가 마주 앉아 맞불질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싸움의 맞불질이 아니고 평화의 맞불질이다. 본래 담배는 평화의 심볼이다. 담배가 아메리카 인디언에서 비로소 나온 것인데, 그들의 신화에 의하면 사람의 자식들이 너무 파가 갈라져 쌈을 하기 때문에 천지 지은 신이 평화의 담배를 피웠다.

 

모든 족속이 무럭무럭 올라가는 그 연기를 보고 모여 들자, 신은 엄숙하고도 간곡한 말로 타이르고 너희는 다 한배 새끼니 싸움 말라, 가서 이 담배를 서로 피고 평화로 살아라.” 했다는 것이다. 나는 담배는 싫어하는 사람이요, 깨끗이 길러낸 자식 담배 빠는 입엔 넘겨주기 싫어 사돈을 하려 할 때는 술 담배 먹나 아니 먹나 그것부터 물어, 만일 먹는다면 무조건 퇴짜를 놓으려는 사람이지만, 그런 평화의 담배라면 나도 이제라도 빨아도 좋다.

 

담배를 망우초(忘憂草)라 하기도 하고, 객대(客對)에 초인사(<>人事)라는 소리도 하지만, 담배에 확실히 사람의 맘을 가라앉히고 느꾸는 것이 있으며 사람과 사람을 접촉시키는 것이 있다. 내가 세계 문제를 의논하려 외교회의에 간다 하여도 우선 담배를 끄집어 낼 법도 하다. 싸움을 하려고 약이 털끝까지 오른 놈도 우선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봅시다.” 하면 좀 누그러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담배에 또 나쁜 것이 있다. 담배를 피우고 맘이 맑을 수는 없다. 그 연기가 자욱한 것은 그 정신의 표시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국제회의를 신용하지 않는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무슨 인류의 장래를 의논하잔 말인가? 취중에 된 교섭, 연막(煙幕) 속에서 나온 조약이 옳을 리가 없다. 언제 가서라도 정치가 술담배 아니 먹는 입으로 되는 날이 오지 않는 한, 세계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취해서, 마비돼서, 한때 잊어서 될 일이 아니고, 똑똑한 정신, 심각한 생각, 기도하는 마음으로만 될 일이기 때문이다.

 

담배 그 자체에 있는 것 아니다. 사람은 맘에 있지. 담배가 인디언에게 있어서는 좋다. 하나, 문명인에게는 독이다. 백두산 천지 가에 단군 할아버지와 백두산 호랑이가 턱 마주 앉아 주먹 같은 대통에 쓴 담배를 잔뜩 담아 산돼지 가죽 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제꺽 불을 쳐 맞불을 빨아 붙여 문 다음 퍽퍽 피는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곤륜산대행산우수리송아리를 뛰어 다니던 이야기를 한다 해 봐, 그 얼마나 시원하고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겠나? 그 뒤에 이어 천하 일 의논하면 어지간히 되지 않겠나?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불과 몇백 년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는 시절을 그리던 것을 보면 아직 기상이 남아 있다. 그것은 평화요, 관대요, 침착이요, 의젓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이런 것을 생각해봐. 스무 살서른 살 붉은 얼굴이 공부해 벼슬한답시고, 글 써 이름 내고 돈 번답시고 책상에 엎디어 담배를 팍팍 피어 손가락은 새빨갛게 이빨은 시꺼멓게 타지, 토했던 것 먹는 개보다 더 더러운 놈들이 양담배 값에 팔려 선거 운동을 하지, 돼지같이 뚱뚱 살이 찐 것들이 달리는 자동차 창으로 반도 채 피지 않은 것을 내던지면, 또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형상을 한 물건들이 뒤로 따라가며 그것을 줍지. 제 영혼 구하고 남의 영혼 구하기 위해 독신을 지키노란 신부가 이미 버리고 난 향락이면 무엇이 또 연연해 눈시울이 붉게 술을 마시고 입술이 퍼렇게 담배를 피우지.(그래도 거룩, 정결, 곧음을 말하나?)

 

너나 나나 이게 무슨 꼴이냐? 담배의 종 아닌가? 아니, 담배의 종이 아니다. 문명의 종이요 발달의 병이다! 호랑이가 담배를 먹을 때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사자가 풀을 먹고 어린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놀것을 이상하며 살 수가 있었지만, 담배가 문명인의 표가 된 오늘엔 그들의 얼굴에서 뵈는 것은 취함이요, 기운 빠짐이요, 간사요, 음험이요, 신경질이요, 비겁뿐 아닌가? 백두산, 히말라야산, 록키산, 우랄산에서 담배를 먹던 호랑이들은 어디로 다 갔을까?


맞서는 두 계급


평화의 담배 벗 호랑이를 잃고 그를 무서워 피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산을 떠나 내려와 저희끼리 울타리 안에 살게 되던 때에 시작이 됐다. 그때부터 겁쟁이가 되고, 겁이 나기 때문에 꾀가 늘고, 꾀가 늘기 때문에 믿음성이 없어지고, 믿음성이 없기 때문에 속이 어두워지고, 약해지게 되었다. 사람은 산에서 나서 골짜기에 내려왔고, 골짜기에서 버덩으로 뻗었다가 그만 성안에 갇히게 된 역사다. 성안에서는 그 전의 평화와 슬기와 날쌤()의 하나 됨을 다 잊어버리고 호랑이만 온다면 벌벌 떠는 겁쟁이가 되었다. 문명인처럼 겁쟁이가 어디 있나? 이야기가 이렇다.

 

()가 천하를 얻어 임금이 된 다음, 세상에서 자기의 다스림을 어찌 아나 알아보려고 한번은 시골을 나갔다. 밭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농사꾼을 보고 슬쩍, “당신 우리나라 임금을 아시오?” 했다. 농부가 그 말을 듣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흙덩이만 깨면서 하는 말이 , 내가 해 뜨면 나오구, 해 지면 들어가구, 내 손으로 우물 파 물 마시구, 밭 갈아 밥 먹구. 임금이구 뭐구 내게 상관이 뭐야?” 했다. 요가 속으로 내가 나 있는 줄을 모르리만큼 했으니 어지간히 하기는 했구나 하면서도 아무래도 맘이 시원치 못했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하자는 맘이요, 가르치잔 생각이므로 호강이나 세력을 부리잔 뜻은 없어, 집을 지어도 백성보다 나은 것이 겨우 흙으로 싼 새 층대에서 더한 것이 없음을 자기도 스스로 알지만, 그래도 어쩐지 맘의 한 구석에 불안이 있었다. 그래 사람을 영천(潁川) 냇가에 보내어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전에 도를 같이 닦던 시절의 친구인 소부(巢父)허유(許由)에게 가서, 나와서 벼슬을 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권했다. 그랬더니 허유가 그 말을 듣고는 에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군.” 하고 그 영천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 소부가 송아지를 먹이면서 마침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그 모양을 보고, “, 그 물 더러워졌다. 그것 먹이면 내 송아지 더러워진다.” 하고 끌고 위로 올라갔다.


장자(莊子)가 초나라엘 갔다가 어느 냇가에서 낚시질을 했더니, 그 나라 임금이 듣고 신하를 보내어 예물을 잔뜩 가지고 와 하는 말이 우리나라 임금이 선생님의 어지신 소문을 듣고 꼭 오시어 우리나라를 위해 일을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했다. 장자가 그 이야기를 듣더니 하는 말이, “이애, 여기 제사 돼지가 있다. 그 놈 살았을 때 진창 속에 뒹굴고 있지만 제삿날이 오면 비단으로 입히고 정한 자리를 깔고 도마 위에 눕히고, 칼을 들어 잡는다. 그때 돼지가 되어 생각한다면 그렇게 죽는 것이 좋겠느냐? 진창 속에서나마 살고 싶겠느냐?


또 너의 나라 사당 안에 점치는 거북껍질 있지? 그 놈이 살았을 때 바닷가 감탕 속에 꼬리를 끌고 놀던 것인데 한번 잡힌즉 죽어 그 껍질을 미래를 점치는 신령이라 하여 비단보로 싸서 장안에 간직해 두게 되니, 거북이 되어 생각한다면 죽어서 그 영광을 받고 싶겠느냐? 감탕 속에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겠나?” 했다. 왔던 사신의 대답이 그야 물론 진창 감탕 속에서 뒹굴고 꼬리를 끌면서라고 살고 싶지요.” “그렇다면, 가서 너의 임금 보고, 나도 감탕 속에 꼬리를 치고 싶단다고 해라. 천하니 임금질이니 그게 다 뭐라더냐?”하고 장자는 물 위에 낚시를 휙 던졌다.

 

마케도니아의 한 절반 야만의 자식인 알렉산더가 천하를 정복할 적에 당시 문화의 동산인 그리스를 말발굽 밑에 두루 짓밟았다. 감히 머리를 들 놈이 없었다. 오는 놈마다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디오게네스란 유명한 어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젊은 아이의 영웅심 자만심에, 으레 제가 나를 보러 오겠거니 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니 왔다. 약도 올랐고, 호기심도 일어나고, 부하를 데리고 디오게네스 있는 곳을 찾아갔다. 가 보니 늙은이 하나가 몸에는 누더기를 입고 머리는 언제 빗질을 했는지 메두사의 머리의 뱀처럼 흐트러졌는데, 바야흐로 나무통 옆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이 나무통은 그의 소유의 전부인데 낮에는 어디나 가고 싶은 데로 그것을 굴려 가지고 가고, 밤에는 그 안에 들어가 자는 것이었다.


디오게네스는 누가 왔거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젊은 영웅은 화가 났다. “너 알렉산더를 모르나?” 제 이름만 들으면 나는 새도 떨어지고, 울던 애기도 그치는 줄만 아는 알렉산더는 맘속에 저놈의 영감쟁이가 몰라 그러지, 제가 정말 나인 줄을 알면야 질겁을 해 벌떡 일어설 테지하는 기대를 가지고 한 소리였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놀라지도, 코를 찡긋하지도 않고 기웃해 알렉산더를 물끄러미 보고 하는 말이 너 디오게네스를 모르나?” 그러고는 목구멍에 침이 타 마르고 있는 젊은 정복자를 보고 비켜, 해드는 데 그림자 져.” 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한개 선비로서 일어나 어지러워 가던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전쟁이 다 끝나고 천하가 완전히 제 손아귀에 들어온 줄을 알게 된 다음, 맘에 좀 불안을 느꼈다. 이제 천하에 나를 칭찬 아니 할 놈이 없고 내게 복종 아니 할 놈이 없건만, 단 하나 한 사내만이 맘에 걸린다. 그것은 엄자릉(嚴子陵)이다. 그는 광무제의 동창 벗이었다. 한 가지 성현의 도를 닦는 시절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벗(知己之友)으로 허락을 했었고, 높은 이상과 도타운 덕에 있어 그가 자기보다 한 걸음을 내켜 디딘 줄을 아는 광무제는, 처음의 선비의 뜻을 버리고 권세의 길을 탐해 천자가 되기는 했지만 자릉이가 자기를 속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줄을 알았다. 그 생각을 하면 앞에서 네발로 기며 아첨하는 소위 만조백관(滿朝百官)이란 것들이 보기도 싫었다. 그래 사람을 부춘산(富春山)에 보내 냇가에 낚시질하는 엄자릉을 데려오라 하였다. 자릉이 따라왔다.


대신이요 무어요 하는 물건들이 뜰아래 두 줄로 벌려 서서 감히 우러러도 못 보는 데를 자릉이 성큼성큼 걸어 광무 앉은 곳으로 쑥 올라갔다. “, 문숙(文叔), 이게 얼마만인가?” 그 동안에 몇 해의 전쟁이요, 나라요, 정치요, 천자요 그런 것은 당초에 코끝에 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하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광무도 도량이 넓다고는 하나 짐승처럼 부려먹는 신하들 앞에서 제 위에 또 권위가 있는 것을 허락해 보여 주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릉이를 신하 대접을 했다가는 당장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고, 물론 자릉이 그럴 리도 없겠지만 광무의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인지 모르는 기()에 눌림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신하들 보고는 너희들은 물러가라, 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서로 정을 좀 풀련다.” 했다. 밤새 이야기를 하다 잤다. 천문을 보는 신하가 허방지방 들어와 큰일났습니다. 객성(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했으니 무슨 일이 있삽는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태백이란 지금 말로 금성인데 옛 사람 생각에 그것은 임금을 표시한다 했다. 객성이란 다른 별이란 말이다. 임금은 절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엄자릉이 자면서 광무의 배 위에다 다리를 턱 올려놓고 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후의 시인이 자릉의 그 기상을 대신 말하여,


萬事無心一釣竿(만사무심일조간)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부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평생오식유문숙)

惹起虛名滿世間(야기허명만세간)


일만 일에 생각 없고 다만 하나 낚싯대라

삼공 벼슬 준다 한들 이 강산을 놓을소냐

평생에 잘못 봤던 유문숙이 너 때문에

쓸데없는 이름 날려 온 세상에 퍼졌구나


했다.

이것은 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대가 그리워서 하는 이야기들이다.


누가 한 수 더 위냐


호랑이 담배를 먹는 이야기를 왜 이 우주 시대라는 지금에도 하며, 하면 왜 루니크2호가 달에 갔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상쾌함을 느낄까?

그것이 역사적으로 있었더냐 없었더냐가 문제 아니다. 없다면 없을수록,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전해오게 되는데, 그 사실을 뛰어 넘는 진실성이 있다. 사실, 사실은 사실의 전부가 아니다. 소위 사실이란 것은 현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데, 현실은 결코 참이 아니다. 현실이라지만 현()이야말로 실()은 아니다. 씨는 언제나 뵈지 않는 속에 있다. Things are not what they seem! 씨가 피어나온 것이 잎이요 꽃이지만, 잎과 꽃이 그 씨가 품었던 전부는 아니다. 씨가 품은 것은 영원이요 무한이다. 그러므로 꽃마다 잎마다 열매를 내기 위하여는 떨어져야 하고 (현실은 없어지고), 그 씨는 또 더 많은, 더 새로운 씨를 위해 땅속에 들어가야 한다. 사실이 중요하지만 사실(事實)은 사실(史實)이 되어야 하고 사실(死實)에 이르러야 한다.


참에서 있음이 나오지만 있는것이 참도 아니요 있던것이 참도 아니다. ‘있을 것, 있어야 할것이 정말 참이다. ()가 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종()이 시()를 낳는다. 신화는 있던 일이 아니요, 있어야 할 일이다. 신화를 잃어버린 20세기 문명은 참혹한 병이다. 신화는 이상(理想)이다. 이상이므로 처음부터 있었을 것이다. 알파 안에 오메가가 있고, 오메가 안에 알파가 있다. 이 문명이란 것은 알파도 오메가도 잃고 중간이다. 중간은 죽은 거요, 거짓이다. 이 사실에 붙는 문명은 죽은 문명이요, 거짓 문명이다.

 

호랑이는 담배를 먹었을 것이요, 사람과 서로 맞불을 붙이고야 말 것이요, 지금도 어디서 마시고 있을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를 먹었다면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다. 먹고야 말 것이다. 선악과를 먹던 에덴동산 이야기를 그리워서 하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을 참 아는 지혜를 얻고야 말 것을 뜻한다. 사람의 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결혼을 했을 것이요, 네피림(巨人)을 낳았을 것이요(창세기 6;4), 또 낳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모든 신화는 요컨대 하나다. 사람과 하나님과 만물이 서로 통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본이요 또 구경 이상이다. 그 신화가 타락하여 전설이 되고, 전설이 타락해 사화(史話)가 되고, 사화가 타락해 사건이 된다. 사건이 나면 죽는다. 문명은 사건의 공동묘실 아닌가?


그러므로 소부허유가 사실로 있었거나 없었거나, 자릉이 정말 광무의 배때기를 눌렀거나 아니 눌렀거나, 디오게네스가 과연 알렉산더를 눈깔을 빨았거나 말았거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과는 별 문제로 이 이야기들은 참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다른 것 아니요, 두 편이 있다는 말이다. 초왕알렉산더한광무 등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문명인과 소부허유장자디오게네스엄자릉 등으로 대표되는 들사람, 그리고 이 세상이 보기에는 문명인의 세상 같지만 사실은 들사람이 있으므로 되어간다는 말이다. 그것을 주장하자는 것이 이들 신화 전설의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이유다.

 

중국 민족같이 실제적인 민족은 없다. 거기서 난 성인 공자는 주로 한 것이 집과 나라와 사회를 어떻게 받들어나갈 거냐 거기 관한 실지 도덕의 가르침이 있지, 우주의 근본이나 생명의 신비 같은 것을 그리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하여 그 가르침이 표준이 되어 임금을 하늘 아들이라 높였는데 그 중국 역사에 어찌하여 내리내리 잊지 않고 세상을 초탈하는 인물을 늘 그 위에 앉히는 사상이 있을까? 또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폴리스란 말이 정치를 뜻하듯이 그들은 정치적인 민족이요 또 과학 발달이 그들에게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디오게네스 같은 인물을 알렉산더보다 높이는 사상이 있을까?

 

그렇게 보면 하필 중국이나 그리스만이 아니라 어떤 민족어떤 나라의 역사에도 이 두 계급의 대립이 있고, 그리고 현실에 있어서는 하나 틀림없이 다 임금을 높이고 신이라고까지 하면서도 그 뒷면의 정신의 세계에선 늘 그 위에 관 없는 왕을, 왕 위에 왕을 앉혀 놓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양 치는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조약돌로 때려 눕혔고, 그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이 어린애처럼 가져다 왕 위에 놓았으며, 인도에서는 임금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하여 거지같은 고행자 앞에 겸손한 제자가 되는 일이 수두룩하였다. 맹자는 임금이 불러도 저는 벼슬 한 가지 높지만 나는 나이도 높고 덕으로도 높으니 제가 어찌 나를 불러?” 하고 아니 갔고, 천작(天爵)인작(人爵)을 말했다.


뼈다귀가 빠질 대로 다 빠지고 살이 썩을 대로 다 썩은 우리나라 이씨(李氏)5백년에 있어서도 그래도 무슨 기백(氣魄)이 남은 것이 있다면, 상투 밑에서 고린내는 났을 망정 한 줌 되는 산림학자(山林學者)에 있지 않았나? 정몽주(鄭夢周)를 때려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선죽교(善竹橋)에 피가 흐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계이방원을 만고의 죄인으로 규정짓는 민중의 판단이지, 왕 위에 또 왕이 있단 말이지 무언가? 야차(夜叉) 같은 수양으로도 미친 녀석 같은 김시습(金時習)을 어떻게나 모셔 보려 애를 쓴 것은 무언가? 칼보다는 더 무서운 칼이 있고 곤룡포보다는 더 아름다운 옷이 있단 말이지.

 

이태조세조는 왜 또 들추느냐? 그밖엔 할 말이 없느냐? 하고 그의 자손과 그의 종들은 강아지처럼 앙절거려 항의를 할 거다. 그렇다, 나는 무식해서 할 말이 그것밖엔 모른다. 나는 무지한 백성의 한 알이다. 내가 이 꼴밖에 못된 것은 그들 때문이다. 한이 뼈에 사무쳤다. 그러나 내가 개인 이성계나 수양을 나무라겠느냐? 다 죽어 썩어져 백골도 없는 그들을 욕해서는 무엇하리오? 그들은 민중을 다스리는 권력, 구속하는 제도의 상징 아닌가? 그의 정신적 권속은 오늘도 씨글거리지 않나? 내말도 못 알아듣는 가엾은 사람아, 너희 같은 것을 위해 최영이 목을 잘리고 정몽주가 맞아 죽고, 성삼문박팽년이 죽고, 유응부가 서서 껍데기를 벗기우고, 김옥균이 총에 맞아 죽고 시체도 평안치 못해 오차 당했단다.


개성에 가면 덕물산이란 조그만 산이 있어 거기는 무당만 몇 십 호가 굿을 해먹고 살아갔는데, 그거는 뭐냐 하면 최영 장군의 영을 뫼신 곳이다. 지금은 물론 미신이지만 당초의 그 유래를 찾으면 태종 때에 비가 아니 와서 사방 기우제를 지내다 못해 누가 말이 최장군의 영이 노해 그런다 하여 그 묘에 제사를 지냈더니 곧 큰 비가 와서 그때부터 그리 됐다는 것이다. 이태조와 최장군이 원수로 대립이 되던 이상 태종의 맘으로 그 묘에 제사하는 것을 허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민중의 생명이 관계되는데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뭐야? 목은 잘랐지만 도리어 졌단 말 아닌가? 민중은 최장군을 더 존경한단 말 아닌가? 과학적으로 보아, 비 온 것이 우연이거나 영검이거나 그것은 별문제로 민중의 맘이 최장군을 위해 절대 받든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살고 죽는, 화복의 마지막 결정권은 민중에 있다.

 

또 김시습이 미친 모양을 하고 다니며 길가에서 오줌을 쌌다. 그것이 누구냐? 그가 길을 가다가는 주저앉아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 하고 통곡하던 바로 민중 그 자신이 아닌가? 오줌을 쌌다니 어디다 싼 것인가? 세조의 정치에 대해, 바로 세조의 얼굴에 대고 싼 것이지 뭐냐? 칼을 뽑아 물을 잘라도 물은 오히려 흐른다고, 사람의 모가지는 자를 수 있어도 민중의 오줌인 신화전설여론은 못 자를 것이다. 봐라! 두고 봐라! 한이 뼈에 사무쳤다니 원수라도 갚을까봐 겁이 나 그러나? 비겁하다! 그게 아니다. 미친 체 오줌을 싸는 것은 원수 갚을 마음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비겁하거나 미워하는 맘에서 싸는 오줌이 아니야. 오줌 쌈을 받는 놈보다는 스스로 좀 넓고 큰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야. 소원이야 예수처럼 죽으면서도 죽이는 놈을 위해 복 빌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만한 얼의 실력은 없으니, 오줌이라도 싸는 것이다.


매월당(梅月堂)의 오줌 한 번 구경하려나? 서거정(徐居正)이 그와 친구였다. 찾아온 김시습을 보고 그림 한 폭을 내놓으며 거기다 뭐라 글을 하나 써 달라 했다. 그림은 강태공이 문왕을 만나기 전 위천에서 낚시질하는 것을 그린 것이었다. 시습은 붓을 들더니 곧 단숨에 내리 갈겼다.


風雨瀟瀟拂釣磯(풍우소소불조기)

渭川魚鳥學忘機(위천어조학망기)

如何老作鷹揚將(여하노작응양장)

空使夷齊餓採薇(공사이제아채미)


비바람 들이치는 위천 물가 낚싯돌에

저 고기 새 너를 배워 세상일 꽤 잊었더니

어쩌다 늘그막엔 난다 긴다 장수되어

쓸데없이 백이숙제 굶어 죽게 했단 말가


거정(居正)이 이것을 보더니 이거 나를 죄 주는 소리로구나.” 했다. 옳은 말이다. 본래 벼슬이라도 해먹는 놈들에게 맞지도 않는 그림이었다. “내가 진리의 왕이다.”는 못할망정 매월당이 쌌던 세종로 종로에 대고 대낮에 오줌을 한 번 갈기고 싶은 일이다. 그만한 들사람얼이 있었으면!


글월과 바탈


칼 마르크스는 계급 싸움을 주장한다. 즉 역사는 있는 놈 없는 놈, 다스리는 놈 다스림 받는 놈이 대립되어 싸우는 동안에 변증론적(辯證論的), 즉 묻거니 대답하거니 하는 식으로 번져 나간다는 것이다. 역사를 묻고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그러는 동안에 자꾸 부정됨에 의하여 차차 높아진다고 본 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잘못 본 점이 있다. 역사는 묻고 대답함이지만 계급 사이의 문답은 아니다. 또 계급이란 말은 해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있고 없음, 누름 눌림의 관계가 아니다. 또 다시, 있고 없음, 누름 눌림이라 해도 좋으나, 그것이 경제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겉에 나타난 것은 그거지만 그것은 속에 보다 깊은 것이 있어서 나오는 현상뿐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의 싸움으로만 알아서는 해결될 수 없다. 역사에 맞섬이 있지만 그것은 평면적인 맞섬이 아니다. 묻고 대답함이 있지만 문답은 동무 사이에는 없다. 아버지와 아들, 선생과 제자 사이, 즉 위아래 관계에서만 정말 발전시키는 문답은 있을 수 있다.

 

말씀은 구경에 있어서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탈의 맞섬(質的對立)이요, 영과 영 사이의 문답이다. 구경을 따져 말하면 역사는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다. 정신과 물질의 대화라 할 수도 있고, ()과 낱()의 대화라 해도 좋다. 마르크스는 유물변증법이라 해서 과학적이노라 하지만 그야말로 비과학적이다. 말씀은 물질에는 있을 수 없다. 뜻은 정신에만 있는 것이요, 문답은 뜻 때문에 나온다. 그러므로 물질이란 말과 변증이란 말은 맞붙을 수 없는 말이다. 역사는 영과 영의 문답이다. 어미 영과 새끼 영이 있어서 문답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랑의 말씀이라 혹은 교()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브라만아트만의 문답이다. 절대와 상대의 문답이다. 하늘과 백성의 문답이다.

 

문답이 일어나는 것은 뜻 때문이다. 빤히 뵈는 형상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뜻은 숨는 것이므로, 숨었기 때문에 뜻이므로, 그것은 현상을 뜯어보아야 안다. 그래 묻고 대답이다. 말씀은 현상을 뜯어 제낌이다. 현상을 뜯어 제끼면 뜻의 샘이 저절로 솟아나오고 피어나오고 자라나온다. 그러므로 뜻엔 처음도 나중도 없기 때문에 처음과 나중을 지어낼 수 있다. 그것이 삶()이요, ()이요, 돼감(歷史)이다.

 

얼은 한 얼이지 둘이 있을 리 없다. 허나 무슨 까닭인지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론 법칙에 의하여 인 얼은 갈라진 것, 맞선 것으로 보인다. 아래, , 고움미움......이것을 왜 그러냐 물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그대로 있음이지 가 없다. ‘의 그물에 걸리는 것은 참이 아니다. 허지만 우리 이성은 이 할 수 없는 것, 소용없는 것을 묻는다. 옛날 말에, 대가리 둘 가진 뱀을 보면 죽는다 했다지만 있음이야말로 대가리 둘 가진 뱀인지 모른다. 대가리가 둘이 아니고 꽁지가 둘인지 모르지, 얼은 일 수밖에 없으니. 대가리거나 꽁지거나 간에 이것을 보았다 하는 순간 이성의 아이는 죽어 버린다. 죽어버리건만 기어이 아니 보곤 못견디는 것이 이성의 버릇이다. 먹지 말란 선악과를 혀가 갈라진(두말 하는) 뱀의 소리를 듣고 기어이 먹고 죽었다 하지 않던가? ‘인 얼이 스스로 하는 데서 이 이성이란 것이 나왔는데 요 당돌한 것이 감히 저 나온 근본을 알아보겠다는 데서 말썽이 생긴다. 역사요, 문명이요, 철학이요, 종교요.


이성은 빛이다. 빛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얼이 운동하던 그 깊음의 어둠을 비쳐 낼 수는 없다. “빛이 어두운 데 비치되 어둠이 받지 않더라.” 사람의 모든 정신적 산물이란, 요 이성의 당돌한 등불이 바탈의 동굴 속을 더듬어 보자고 애를 쓰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하는 소리가 항상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 모르긴 하거니와 바탈의 얼이 두 얼굴이 아니고 이성, 제가 눈이 두 알이 돼서 모든 것이 이원(二元)으로 보일 것이다. 눈이 두 알이라 하는 것이 좋을지 하나는 제 모양이고 하나는 그림자라 할지. 어쨌건 사람은 을 찾으면서도 둘밖에 못 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맞섬으로 된다. 상대적이다. 우리는 반대적이다. 우리는 반대 없이는 생각할 수도 살 수도 없다. 이 소리조차도 이성이 할 수 없어 하는 말이다. 천번을 되풀이해도 결국 무극(無極)이 태극(太極), 태극이 양의(兩儀)라는 설명, ‘브라만아트만’, ‘아트만브라만그 중간에 있는 구나스()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설명,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고, 사탄의 유혹으로 잘못됐으며 그 중간에 하나님이면서 사람, 사람이면서 하나님인 인격이 서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설명, 그 밖을 나갈 것이 없을 것이다. 사람의 몸이 돼먹음도 맞섬으로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팔다리가 대립, 왼편 바른편이 대립, 눈 둘, 귀 둘, 콧구멍 둘, 들어가는 구멍 나가는 구멍, 입 하나로 먹고 말을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하나로 배설과 생산을 겸해 그것도 대립,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골통은 하나다. 인생과 역사는 대립에 있고, 구경은 하나 됨에 있다.


이것을 사람의 문화사 위에서 말하면 문()과 야() 곧 글월과 바탈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역사는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것 같이 지배 계급 피지배 계급의 싸움이 아니라, 문인(文人)과 야인(野人)의 문답이요 싸움이다. 가진 놈 못 가진 놈의 대립도, 누르는 놈 눌린 놈의 대립도, 이 문()과 야()의 대립에서 나온다.

 

글월을 주장하느냐? 바탈을 주장하느냐? 물론 바탈이 있어서 글월이요, 글월 아니고는 모르는 바탈이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늘 싸움이 있다. 글월이란 무늬란 말이다. 비단을 짜고 거기 군데군데 무슨 형상을 그려 놓으면 보기가 더 좋다. 그것이 무늬다. 한문의 문()자는 그 금을 이리저리 그어 놓은 형상이다. 그러므로 글과 그림이 하나다. 우리말에 ’ ‘그림이 한 말인 것은 이 때문이요, 옛날 글자가 그림으로 시작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림은 왜 그리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립다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맘속에 그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얼굴을 그려본다. 그래 그리운 사람이다. 그리우면 그 감정을 나타내고 싶어진다. 그것이 글이다. 노래편지. 글은 그것 하기위해 발달된 것이다. 그러면 글월은 속에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나타내는 것은 무엇으로나 나타낼 수 있다.


꽃이 물 위에 뚝 떨어지는 것을 볼 때 거기 말할 수 없이 좋은 것을 느낀다. 낙화수면개문장(落花水面皆文章)이다. 가을날 맑은 물 위를 바람이 슬쩍 불어갈 때 거기 아름다운 무늬가 나온다. 추수문장(秋水文章)이다. 어슬터슬한 도끼로 깎으면 나무의 결에 무늬가 돋혀 나온다. 두보(杜甫)가 고백행(古柏行)에서 불로문장세기경(不露文章世己驚)이라 한 것은 이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좋은 느낌을 하는 것은 거기 무슨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요, 보람을 느끼는 것은 그 꽃나무바람을 타서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이 잡혀지고 나오고 자라기 때문이다. 즉 자아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 실현되어 나온 것이 문() 곧 글이다. 하늘의 천체를 통해 나오면 천문(天文), 땅의 것을 통해 나오면 지문(地文), 사람 자기의 일을 통해 나오면 인문(人文), 그러나 무엇을 알았든지 결국 안 것은 자기요, 드러낸 것은 제 속에 있는 얼이다. 자기의 실현이란 곧 참의 실현이다. 내가 곧 부처요, 하늘나라가 내안에 있기 때문이다.

 

()에 대해 야()는 뭐냐? 무늬에 대한 바탕이다. 질소(質素)라 하는 데 질()도 바탕이요, ()도 바탕이다. ()은 형()에 대해 하는 말이다. 나타나면 형(), 나타나지 않은 것은 질(), ()는 희다는 뜻으로도 쓰는데, 무늬 놓지 않은 비단 그것이 소(). 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림은 바탕 뒤에 온다.

 

또 박([])이라는 자가 있다. 박은 다듬지 않은 나무다. 나무를 다듬으면 고운 무늬가 나오고 아로새기면 아름다운 형상이 되지만 그렇게 하기 전 나무대로 있는 것이 박이다. 또 순(), ()하는 글자들이 있다. ()은 진한 술이다. ()은 순()과 통해 쓴다. 이 말들이 다 바탕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손질이 가지 않은 그대로 있는 것이란 뜻이다. 그 바탕이 좋다는 뜻에서 질소(質素) 질박(質朴) 순박(醇朴)’ 하는 말들이 있다.


(), 곧 들은 도(), ()에 대해 쓰는 말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읍, 그 읍 중에서도 나라 임금 있는 곳이 도(). ()는 그 도읍 밖에 나와서 있는 들, 교외(郊外). 시골, 농촌이다. 야인, 들사람은 시골 사람, 두메 사람이다. 야인헌근(野人獻芹)이란 말이 있다. 시골 놈이 제 입에 가장 맛있는 것이 미나리니까 그것을 가지고 임금께 바치겠다고 가지고 간단 말이다. 야인은 또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으로도 쓴다. 여당야당 할 때의 야는 그것이다.

 

야는 그렇듯 본래 문()에 대한 바탕을 가르치는 말이건만 문을 좋게 여기는 사람이 바탕을 나쁘게 보기 시작하여서 야비(野卑야심(野心야만(野蠻조야(粗野)’ 하는 말들이 나왔다. 논어에 질승문즉야(質勝文則野), 문승질즉사(文勝質則史), 문질빈빈연후군자(文質彬彬然後君子)” 란 말이 있다. ()이 문()보다 지나친 것, 즉 글월을 돋히지 못하고 바탈대로만 있으면 야()해 못쓰고 반대로 글월이 너무 지나치면 사()해 못 쓴다. 사는 지금은 역사란 뜻으로만 쓰이지만 본래는 관청에서 무엇을 기록하는 서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관청의 기록이란 언제나 형식적인 것이다. 여기 사라 한 것은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문과 질이 빈빈(彬彬), 알맞게 조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공자로도 이상적인 지경을 못 얻을진댄 차라리 질, 바탕편이 낫다 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을 했다. 그래 자공(子貢)이 그 뜻을 알아듣고 , 그럼 예()가 뒤에 온단 말씀입니까.” 했다. 그 뜻은 사람의 글월인 예가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바탕 되는 충()이요, ()이요, ()이 있고 말이지, 그것 없이 해서는 도리어 해란 말이다. 그래서 공자는 또 다른 데서 예여기사야영검(禮與其奢也寧儉)”이라 했다. ()는 꾸밈이 너무 지나친 것인데, 예는 그것보다는 차라리 검()한 것이 낫다는 말이다. 검이란 검소 검약하는 말들이 표시하는 대로 수수한 바탕대로 함이다.


공자는 문을 퍽 중요하게 생각했으므로 사람의 정신적인 지음 왼통을 문() 한자로 표하여 사문(斯文)이라 했고, 자기의 사명이 그 글월을 지키고 빛내 후세에 전하는 데 있다고 느껴서 어느 때 신변의 위험을 느꼈을 때 제자들이 걱정하니, “하늘이 이 글월을 없애신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이야 무슨 걱정이 있느냐.” 고 말한 일까지 있고, 사람을 가르치는 과목을 넷으로 나눠 하는데 문을 첫째로 넣어 ()()()()’ 이라 했다. 오늘날도 동양에선 문화 문명 해서 사람의 정신적 물질적 힘써 만든 모든 것을 문으로 표시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 된 일이다.

 

하지만 에서 보면 아는 대로 문은 그 하나에 지나지 않고 그 다음 점점 높은 지경은 다 사람의 속, 바탕에 관한 것임을 볼 때 공자의 뜻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래 그는 술이부작(述而不作)” 이라 한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겸손한 말이다. 바탈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문화활동이라 해서 현대 사람은 창작이란 말을 헤피 쓰지만 공자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감히 짓는다 할 수 있느냐? 나는 본래부터 있는 것을 펴서 설명할 뿐이다.” 하는 말이다. 본래부터 있는 것은 바탈이다. 천명이요 성()이다. ()은 그것을 내 처지에 따라 내 힘대로 드러낸 것이다. realize한 것이다.

 

문명은 실현이다. 문명문화의 명()이나 화()는 그 뜻을 표시하는 말이다. 바탈 곧 실(), 참이 있어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밝힘이요 됨이다. 서양 말에 culture 라는 말도 같은 뜻을 나타낸다. ‘길들이다’ ‘재배하다는 뜻인데 이것은 사람이 자연에 붙어 사냥질을 하며 왔다 갔다 하며 살던 것을 버리고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살며 짐승을 기르고 곡식을 재배하던 때부터 이른바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므로 하는 말일 것이다. 야생의 식물 동물을 길들이고 기름으로 그 속에 들어 있는 바탈을 점점 드러내게 됐다. 그것이 발달, 그 발달을 시키므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무엇을 또 드러낸다. 모여 사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복잡해지고 그것을 알맞춰 고루어 가기 위해 여러 가지 풍속규칙제도가 생겼다. 그것이 시(), 시민(市民), 정치(政治). civil이다. 그래 civilization이다.


문명은 병이다.


사람은 나르시스다. 저 한 일에 취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일이다. 제게 취하지 않은, 제 지은 것에 종이 되지 않은 개인도 시대도 별로 없다. 문명인은 제 글에 취한 사람이요, 제 만든 기계에 종이 된 죄수다. 타골이,


죄수야, 말해봐, 이 끊을 수 없는 사슬을 만든 것은 누구냐?

죄수 대답하는 말, 나입니다. 내가 이것을 공력 들여 만들었습니다. 나는 아무도 내 힘을 당할 자 없다 생각했고, 그 힘으로 온 세계를 잡아 가두면 아무도 내 자유를 방해할 놈은 없으리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밤낮으로 무서운 불길에 지독한 메질로 이 사슬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에 일을 다하고 고리를 끊어지지 않도록 다 이어 놓고 보니 꼭 붙들어 매인 것은 나였습니다.


할 때 그것은 20세기 문명인을 그린 것이다. 에드워드 카펜터의 말대로 문명은 병이다. 역사상의 어느 문명도 제 속에서 난 원인 때문에 망하지 않은 문명이 없다. 이집트가 그렇고, 바빌론이 그렇고, 앗시리아가 그렇고 아테네, 스파르타, 로마, 옛날의 인도, 중국이 다 그렇다. 그리고 그 원인은 언제나 다름없이 꼭 같이 문명으로 인하여 정신이 약해지는 데 있다.

 

그럴 때면 반드시 소수의 들사람이 나타나서 썩어져 가는 백성을 책망하여 맘 속에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도로 찾도록 부르짖는다. 그 말을 들으면 살아났고, 아니 들으면 죽었다. 중국의 노자, 장자는 다 야인(野人)정신을 부르짖는 사람이다. 주나라 시대에 와서 고대의 소박을 잃고, 춘추전국시대에 온 즉 점점 더 세상은 재주와 꾀만 숭상하고 형식적인 제도의 폐해가 심했다. 그러므로 그 풍을 고치려고 외친 것이 그들의 문명주의에 반대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었다.

 

서양에서 하면 그리스의 옛날 씩씩한 정신이 없어지고 궤변만 늘어 가려 할 때 불쑥 차고 일어난 것이 소크라테스였다. 허술한 옷에 발을 벗고 아테네 길거리를 큰 걸음으로 걸으며 만나는 젊은이거든 붙잡고 닦아세운 그는 확실히 야인이었다. 그는 제 손으로 기록도 아니 남겼다. 그랬기에 그도 문화의 저자 무리들한테 잡혀 독살을 당하지 않았나?


미국의 휘트먼, 소로도 야인이다. 맨발을 벗고 가슴을 풀어 헤치고 큰길을 걸으며 운도 없이 곡조도 없이 부르는 [풀잎] 노래, 월든 호숫가에 막을 치고 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원시림 속의 공기를 마시는 것 같다. 그들의 사상 아니었더라면 미국은 더 썩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인의 가장 좋은 역사는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다. 그 나라의 종교 정치 교육의 터를 잡아 놓은 모세부터 야인이었다. 이집트 문명 속에서 40년을 자란 그건만 그것으로 민족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알자 그는 시내 산에 가서 문화인의 때를 벗기고 명상 가운데 바탈을 찾아내기에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완전히 들사람이 된 후 그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이집트 문명에 맞섰으며 거기서 민족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 이집트 문명의 폐해에 중독이 된 민중을 훈련하여 새 역사를 짓는 정신을 길러 주고 목적지인 가나안에 들어가 이미 있는 문명과 싸워 이기게 하기 위하여 빈들에서 또 40년을 야인 생활을 시켰다. 그의 제도가 어떻게 간결한 것이며 그 정신이 어떻게 굳굳한 것임은 구약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는 시내산 산화산의 연기와 아라비아 사막 냄새가 난다.

 

그랬건만 그래도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미 있는 문화에 젖어 썩으려 했으므로 예언자가 이어 이어 일어났다. 예언자란 거의 다 야인이다. 예레미아,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세례 요한은 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이요, 예수는 순수한 들사람이었다. 그는 들의 백합을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다이 알았고, 생활 방식을 공중에 나는 까마귀에 배웠으며, 그의 눈엔 당시에 서슬이 시퍼런 헤롯도 한 마리 여우로밖에 아니 보였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할 때 그는 온전히 문화인의 테두리 밖에 섰다.

그래 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 했다.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매양 기독교를 말하려 할 때 유대의 위치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두 문명의 통하는 길에 놓여 있는 것을 힘써 말하지만 옅은 소견이다. 기독교의 기독교된 것은 당시의 먼저 있던 문화를 배웠다는 데보다 능히 거기 물들지 않고 그와 전면적으로 겨뤄 싸워온 데 있다.

예언자의 공로는 거기 있다. 기독교가 서양 문명의 등떠리뼈 노릇을 했다면 그것은 문명긍정주의로서가 아니요, 문명 부정주의로서일 것이다.


들사람이여 오라!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들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해독을 가장 심히 받고 있는 나라다.

그 원인은 우리가 급작히 남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본래 문명은 제가 스스로 낳아야 하는 것이다. 문명은 정신이 아니고 지식이요 기술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받으면 반드시 해가 된다. 받아도 천천히, 달리던 차를 정지하는 모양으로, 브레이크를 대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의 문명을 급작히 받고 망하지 않은 민족 있나 보라!

 

아시아가 물질문명에서 떨어진 것이 죄가 아니다. 차이가 심한 서양 것을 급히 받게 된 것이 불행의 원인이다. 토인에게 총을 주면 그 토인은 반드시 망한다. ? 기술 지식이란 정신이 능히 그것을 자유로 쓸이만큼 발달한 후에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기계를 주면 상할 것은 정한 일 아닌가? 정신이 서기 전에 기술 문명이 먼저 들어오면 그 사회의 자치적인 통일을 깨뜨린다. 그러기 때문에 망한다. 간디가 물레질을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기계가 덮어놓고 나쁘단 건 아니다. 원시적인 인도 사회에 영국의 고도로 발달된 기계와 공장 조직이 들어오면 반드시 인도 사회는 파괴될 것이므로 기계를 써도 물레질을 하여 자립하는 토대를 만든 후 끌어오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진 일 아닌가? 지금 우리는 해방 후 급작히 미국 문명이 홍수처럼 들이밀렸다. 미국 기계를 가져다 공장을 시설하는 사람은 한 때 돈을 모으겠지만, 우리 경제는 반드시 파괴된다. 사실을 보고 있지 않나? 미국 사교풍을 모방하는 사람은 일시 쾌락을 느낄 것이지만 우리 사회 질서는 깨진다. 지금 우리 당하는 혼란은 이것이지 다른 것 아니다.


그럼 달리는 차 같은 이 시대 풍조에 어떻게 하나? 누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그 차에 브레이크를 대는 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 죽더라도 휩쓰는 이 물결을 막으려 홀몸으로 나서는 야인, 들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엔 영리한, 약은 문화인만 있고 어리석은 들사람이 없어 이 꼴이다.

교사도 목사도 다 약다. 다 제 몸을 보호할 줄 안다.

저봐, 저봐! 차가 내리닫는다. 저러다는 깨질 거야!”

하고 보고 서 있는 것이 우리 종교가요 교육가다. 소크라테스처럼, 세례 요한처럼, 예수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다. 막 대드는 청년들이 강도 살인을 자꾸 하는데 막으려 드는 사람이 없다.

 

이 백성만, 이 시대만 더 악해 그런 것이 아니다. 속에서 뒤끓는 혼을 누가 불러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 바로 불리기만 하면 좋은 개척자가 될 사람이다. 산 범이라도 잡을 기운을 어디다 쓰게 해 주지 않으니 그 사회에 대해 복수를 할 밖에 없지 않은가? 학생 놈들이 벌써 감투싸움을 하고 권세 있는 집 문간 드나들고, 춤추러 다니고,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지만 학생이 본래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도 고상한 사상을 주는 사람도 없고, 속에 자고 질식하려는 혼을 불러 일으켜 주지 않으니 그리 되는 것이다. 사람의 혼은 아무리 타락이 됐다가도 정말 하늘 소리를 들으면 깨는 법이다. 하늘 소리까진 몰라도 나라의 목소리라도 들으면 좀 감격하는 법이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는 나라의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있다. , 정부 관청의 명령이 날마다 쏟아져 나오지 않나, 학교의 훈화가 시간마다 있지 않나, 종교가의 설교가 늘 있지 않나 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 나라가 거기 있느냐?

하나님이 거기 있느냐? 나라도 하나님도 피 뛰는 심장 속에만 있다.

혼은 빈말엔 아니 움직인다.

남의 혼을 부르려면 내 혼부터 나서야 한다.


혼은 어떻게 하면 나서게 되나? 혼을 가둔 몸이 찢어져야지. 간디가 죽어서 그 공명자를 더 얻고, 예수가 죽어서 그를 믿는 자가 세계에서 일어난 까닭을 모르나? 그 혼이 육신의 가둠을 터치고 완전히 해방됐기 때문이다. 들사람이란 다른 것 아니고 스스로 제 육을 찢는 자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술을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꾀를 모른다, 인사를 모른다, 체면을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요,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 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사람,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들사람이여, 옵시사! 와서 이 다 썩어져 가는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사람의 삶이 싸움인 줄을 모르나 봐! 싸움을 주먹으로 하는 줄, 무기로 하는 줄, 꾀로 하는 줄만 알고 기()로 하는 것인 줄, 얼로 하는 것인 줄을 모르나 봐. 삶은 싸움이요 싸움은 정신이다. 힘이 없고, 생각이 아니 나고, 지식이 떨어지고, 꾀가 모자라는 것은 정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혼은 우주의 근본 되는 절대의 정신과 그 바탈이 하나이기 때문에 바로만 하면 거의 무한한 능력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문명인의 잘못은 문명을 믿는 나머지 근본정신을 잊는 일이다.

 

시베리아에 있는 야만이라는 추쿠치족()의 말이 있다. 그들의 말이 옛날엔 사냥을 하면 몇십 리 밖에 있는 짐승도 보고 들을 수가 있고 창이나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는데 웬일인지 이놈의 홀레바(러시아 사탕 빵)를 먹게 된 다음부터는 도무지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문명, 더구나 제 마음이 연구해 내지 못하고, 남의 한 것 받아들인 문명은 분명히 혼의 힘을 해친다. 생명의 법칙은 스스로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자고 병들고 줄어져 있는 혼을 깨워 일으켜야 한다.

 

우주여행이라지만, 그것은 결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정신의 문제지. 요 지구에서 생긴 곰팡이 같은 정신으로 달나라에 가서도 영토 운운하고, 국기고 뭐고 그런 것을 가지고 갈 생각을 해서는, 한동안 설혹 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류 멸망의 원인 밖에 아니 될 것이다.

바벨탑 이야기를 모르나? 반대로 이제 우리가 아무리 지식 기술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정말 우주적인 크고 높은 정신에 철저하다면, 소련이나 미국의 지금 앞선 것쯤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생각과 정력을 몇 해나 더 민중을 누르고 짜먹을 수 있나 거기만 쓴단 말이냐? 너희 생각이 그렇게 작고 비루하니까 너희 자식들이 저렇게 망나니가 되지.

그러나 이제라도 아니 늦다!



새벽 195911월호

저작집30; 1-19

전집20; 2-129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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