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9_ 실상사 보현법회 회주 도법스님


노래 : 해탈의 기쁨

 

한생각 바로돌려 얽힌번뇌 끊고보니
천상천하 넓은우주 걸릴것이 하나없고
평등한 성품속엔 너와내가 따로없네
대자재 유아독존 바로 이것인것을
해탈의 참된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윤회의 고해에서 피안언덕 이르러니
어두웠던 나의마음 한순간에 밝아지고
본래의 천진면목 진실하게 드러나네
위없는 님의진리 영원한 빛가운데에
열반의 대합창이 온누리에 가득하네

 

1. 
방금 부른 노래 가사를 보니까 ‘해탈의 참된 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열반의 대합창이 온 누리에 가득하네.’ 이렇게 되어 있네요. 해탈은 ‘자유’라는 이야기고, 열반은 ‘평화’라는 이야기인데, 어떠세요? 평소 살면서 자유를 느낀 적 있으세요? 또는 평화를 느낀 적이 있으세요?

 

인생사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해탈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열반이라고도 이야기 하죠. 해탈은 ‘자유’라는 말이고, 열반은 ‘평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면 행복하다’ 이런 얘기가 됩니다. 다른 건 사실 다 군더더기예요. 스스로 삶이 자유로우면, 또 평화로우면 그게 최고다, 그 얘깁니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 중에 대표적으로 많이 인용해서 얘기 하는 것이 있는데요, 
첫 번째,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말 못 알아듣는 사람 빼고, 말을 알아듣는 사람의 경우 같이 얘기 했을 때,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진리고, 나의 가르침이다.
두 번째, 이해되는 대로 실천하면 즉각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진리이고 가르침이다. 
세 번째, 정말 바로 이해가 되는지, 즉각 이루어지는지 바로 증명, 검증 되는 것이 나의 진리이고 가르침이다.

 

저는 부처님 경전 중에서 이 세 가지 내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불교의 사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내용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하는데 이렇게 즉각 이해가 되고, 즉각 이루어지기도 하고, 증명되기도 하면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잘 하는 것이고, 그것이 잘 안되고 있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잘 따져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부른 노래가 ‘해탈의 기쁨’인데, 어떠세요? 바로 이해가 되시는가요? 또 자유가 바로 이루어지는가요? ‘아, 그렇네’하고 자유로움을 느끼는가, ‘아, 그렇네’하고 평화로움을 누리는가. 어떻습니까? (...)

 

그렇지 않죠? 뭔가 그럴듯하기는 한데, 왜 그게 바로 이해가 안 될까, 부처님은 분명 즉각 된다고 했는데 말이죠. 이 노래가사 자체가 부처님의 말씀을 노래로 만든 거잖아요.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노래도 부르고 얘기도 하고 있는데 왜 부처님 말씀처럼 자유로움을, 또는 평화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가? 참회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가? 전생의 업 때문에 그런가? (웃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 이유는 잘 몰라서 그래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자유와 평화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인거죠. 모든 생명이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해요. 어쩌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유롭고 싶다, 평화롭고 싶다고 하는 것이 생명이 가지고 있는 바람, 소망입니다. 스님들이 청춘을 불사르고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도 그 삶을, 그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지요.

 

인생살이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의 삶은 틀림없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어쩌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많이 경험하고 있어요. 경험하고 있는데 본인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경험하고 있는데 본인이 모르는 경우, 그런 경우가 많죠? 그런데 우리는 ‘아, 이런 것이 자유구나’, ‘이런 것이 평화구나'하는 것을 사실 부지기수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자유고, 평화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평화로움, 자유로움이 굉장히 짜릿한 무엇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감각적으로 대단히 짜릿한, 마치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짜릿함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죽어라고 더운데 죽어라고 목마르다. 그 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했다. 어때요? 그때 기분이? 짜릿하겠죠? 아니면 얼려 놓은 냉수를 시원하게 마셨다. 실제 짜릿함이 느껴지잖아요.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데 그 행복도 이런 짜릿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그러기 때문에 그 짜릿한 재미를 찾아 동네방네 쫓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런 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짜릿한 충족감으로 행복해지려고 하는 한 영원히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짜릿한 재미를 찾으려고 동서남북으로 항상 쫓아다니고 있죠. 그래서 바빠요. 힘도 들고. 그 짜릿한 재미를 느끼려면 공짜로 안 되잖아요. 그렇죠? 돈이 많이 들어가야 되죠.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짜릿한 즐거움의 노예가 되는 거죠. 이것이 중생이에요. 이 ‘짜릿한 즐거움이 충족되어지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하는 무지와 착각 속에 빠져 짜릿한 무엇을 쫓아 사는 거예요. 한 마디로 얘기해서 감각적인 기쁨. 눈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입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코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귀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마음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기쁨. 온통 감각적인 기쁨을 탐닉하는 것, 이것이 중생입니다. 거기에 노예가 되어 사는 것이 중생이고, 그 기쁨이 충족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거죠.
 
이 무지와 착각을 놔둔 채로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행복해 질 수 없어요. 이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이 무지와 착각으로부터 깨어나지 않는 한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가 어려워서 불행하다, 일자리가 없어서 불행하다, 이렇게들 이야기 하고 있죠. 물론 일자리니 경제니 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경제가 좋아지면, 일자리가 많아지면 바로 행복해지는가? 그건 아니죠? 직업 있고 돈 있는 사람도 여전히 불행하다고 하잖아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대부분 더 편리하고, 더 풍족하고, 더 맛있게 먹고, 더 쉽게 가고, 더 재밌게 하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쓰고 그러면 행복해진다-라고 믿고 그것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 나쁜 거짓말, 대단히 위험한 거짓말임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경험하고 있어요.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온 100년 역사만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됐어요. 지금은 죽네, 사네, 하지만 3만 불을 얘기하고 있지요. 3만 불이면 부가 몇 배로 증가한 거예요? 300배예요. 생활의 편리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훨씬 더 편리해졌어요. 민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화가 후퇴한다고 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고, 그것을 막기 위해 비판도 하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죠. 비록 그렇게 후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민주화도 300배는 이루어졌을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대통령을 국민이 뽑는 거죠. 옛날에는 나라의 대표인 임금을 국민이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집안이 만들었어요. 임금을 만드는데 국민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임금격인 대통령을 누가 만듭니까? 국민이 표를 줘야만 대통령이 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대통령을 만드는 주인이에요.

 

옛날엔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어요. 그랬다가는 삼족이 멸했죠.  
진안에 가면 죽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소위 역성혁명을 일으켰던 정여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말 때문에 죽었습니다. ‘임금의 종자가 따로 있나’ 그랬던 거죠. ‘실력 있으면 임금 하는 것이다. 임금의 종자가 따로 없다. 그가 누구이든 정말로 만백성을 위해서 역할을 잘 할 사람이면 그가 임금 되어야 된다. 집안이 좋다고 해서 실력도 없는데 임금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이 이야기를 해서 결국은 죽은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실제로 실력 있으면,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면 누구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잖아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물질적으로 300배 더 풍요로워진 것보다 더 커다란 변화죠. 천지개벽하는 변화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더 물질적으로 많아지고, 더 편해지고, 더 좋아지고, 더 재미있고 등등 이렇게 해서 행복해지는 거라면 적어도 우리는 300배는 더 행복해졌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못살겠다는 아우성은 그 때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왜 그렇게 된 걸까요?

 

바로 그런 ‘감각적 기쁨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라고 하는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깨달음’이 다른 게 아니에요. 이것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 거죠. ‘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첫 번째가 그거죠. 그 생각을 내려놓고 보면  우리가 사실은 일상 속에서 무수하게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감각적 짜릿함이 아닌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2. 
노래가사를 가지고 얘기를 조금 더 해 보죠. ‘생각 바로 돌려 얽힌 번뇌 끊고 보니 천상천하 넓은 우주 걸릴 것 하나 없고.’ 걸릴 것 하나 없다는 말이 곧 해탈, 자유라는 말이죠. ‘평등한 성품 속엔 너와 내가 따로 없네. 대자재 유아독존 바로 이것인 것을. 해탈 참된 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자, 여기서 ‘얽힌 번뇌 끊고 보니’라고 했습니다. 어때요? 번뇌를 끊기 위해 많이 노력하시죠? 끊어지던가요? 어떻습니까? 번뇌를 끊기 위해 부처님에게 가서 빌기도 하고, 진언도 외우고, 화두도 들고, 염불도 하고, 위빠사나도 하고, 온갖 것을 다 할 텐데, 어떻던가요? 번뇌가 끊어져야 해탈이라고 했는데 끊어지던가요? ‘천상천하 걸릴 것 하나 없고.’ 실제적으로 해보니까 어떻습니까?

 

- 대중 : 끊으려고 하면 더 생각이 나요.

 

그렇죠. 더 생각이 나지요? 그런데 잘 관찰해보면 사실은 염불하면 한 번 하는 만큼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어요. 실제로는 화를 한 번 안내면 덜 낸 만큼 번뇌로부터 해탈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잘 관찰 하지 않는 거예요. 관찰은 하지 않고, 번뇌가 끊어진 상태를 그림으로 그리고만 있지요. 현실이 내가 그린 그림하고 안 맞는 거예요. 이게 환상이고 착각인 거죠. ‘번뇌가 끊어지면 이럴 거야’, 이러면서 번뇌가 끊어진 상태를 스스로가 조작하고 있는 셈이죠. 
 
번뇌는 염불하는 대로 즉각즉각 끊어지게 돼 있어요. 번뇌의 감옥으로 부터 바로바로 해탈하게 돼 있어요. 화두 들면 화두 드는 대로, 염불하면 염불하는 대로, 진언 외우면 진언 외우는 대로, 즉각 이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돼요. 그러면 번뇌로부터 해탈한 거잖아요. 그렇죠? 번뇌에 갇혀 있다가도 정신 차려 염불하면, 그 순간 바로 번뇌로부터 벗어나오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즉각즉각이에요. 하는 대로 바로 되기 때문에 시간이 안 걸려요. 목마를 때 물 마시면 목마름이 즉각 해결되나요, 아니면 십 년 후에 해결되나요? 어떻습니까? 즉각 해결되죠? 이것도 똑같아요. 

- 대중 :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목마름이 또 오잖아요.

 

그러니까 또 마셔야죠. 한 번 마시고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입니다. 한 번 하면 다 끝난다는 생각이 착각인 거예요. 그런 일은 없어요. 끊임없는 연속이에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저 다리 밑에 흐르는 물과 같은 거예요. 물은 늘 있죠? 그러면서도 늘 흘러가고 있어요. 내 인생도 저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내 마음도 저렇게 흘러가고 있고요.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딱 붙잡고 싶어 해요. 내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따로 붙잡으려고 하는 이것이 집착인거죠. 망상인 것이고.

 

왜냐하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만약에 저 흐르는 물중에서 어떤 부분을 붙잡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흐르는 물이 아닌 거잖아요. 고인 물인 거죠. 고인 물은 썩습니다. 썩으면 어떻게 돼요? 독이 돼요.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늘 마치 로또 복권 당첨 되듯이 딱 한 방에 되기를 바랍니다. 한 방에 끝나기를 바라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한 방에 되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무지와 어리석음이죠. 그것이 무명입니다.

 

목마를 때 물 마시면 즉각 목마름으로부터 해탈하듯이, 염불하면 즉각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물 마시는 순간, 목마름 때문에 겪는 고통이 바로 해결됩니다. 그렇지만 못 견디게 목마르지 않고 그저 평범한 상태에서 물을 마시면 어떨까요? 짜릿한 재미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별로 그런 재미가 없죠. 그것과 비슷한 거예요.

 

그러니까 꼭 짜릿해야만 좋은 것이라고 하는 생각, 이것이 망상, 어리석음이라는 거죠. 짜릿해야만 좋은 것이라는 생각, 이것 자체가 무지와 착각이라는 거죠. 그것은 좋은 것이지도 않고, 짜릿하다고 해서 좋아지지도 않습니다. 

 

3.
구체적으로 한 번 볼까요? 번뇌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주로 ‘번뇌’라고 하면 ‘나쁜 생각’, ‘어지러운 생각’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쁜 생각만이 번뇌는 아니에요. 예를 들어 볼게요.

지금, 여기라고 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나의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실상사 설법전이라고 하는 세계에 있습니다. 여기서 번뇌가 무엇인가요. 실상사 큰 방에 있어야 할 시간이면,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여기 있어야 되죠. 그런데 실제 큰 방에 몸이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도 여기 앉아 있나요? 그렇지 않죠? 마음은 제멋대로 돌아다니죠. 이게 문제인거죠.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큰 방에 앉아 있자’, 그리고 ‘큰 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듣자’ 이렇게 하기로 한 거잖아요.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인 거죠. 이것 말고 그 밖의 다른 것은 다 망상인 거예요. 부처님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하나님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돈을 생각해도 망상이고, 누구를 속여 먹으려고 생각해도 망상이고.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이 온전하게 함께 있는 것 말고는 다 망상이에요. 꼭 나쁜 생각만 망상이 아니란 말이죠.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이 오롯하게, 온전하게 있도록 하는 걸 우리는 참선이라고 얘기하고, 염불이라고 얘기하고, 기도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참선하는 사람, 화두 드는 사람에게는 화두 말고는 어떤 생각도 다 망상인 거예요. 내가 지금 화두를 들려고 마음먹었으면 마음먹은 대로 화두를 들어야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만약 화두를 들려고 마음먹었는데 화두를 드는 중에 부처님 생각을 한다든가 또 다른 좋은 일을 생각한다든가 하면 이것은 망상일까요, 아닐까요? 이런 것도 다 망상인거예요.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 위빠사나를 수행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 자체에 오롯해야 되지, 이것 말고 화두를 들겠다고 생각한다든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다든지 하면 이것도 다 망상인거예요.

 

거듭 말하지만 좋은 생각이라고 해서 망상이 아닌 게 아니라는 거죠. 몸과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이 현장, 이 시간, 이 장소에 온전하게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에 오롯하게 몸과 마음이 하나로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다 번뇌인 거예요. 어제를 생각하는 것, 내일을 생각하는 것, 애인을 생각하는 것, 부처를 생각하는 것 다 번뇌인 거예요. 지금 여기에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하나가 돼 있지 않은 한 다 번뇌인 거예요.

 

여기서 ‘번뇌를 끊고 보니’ 그랬는데, 이 번뇌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 온전하게 있으면 번뇌가 끊어지는 거예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이죠. 부처를 생각해보죠. 제가 늘 ‘노는 입에 염불 하세요’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최고의 수행은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시시하게 생각해(웃음).

 

마음도 놀리고 몸도 놀리고 입도 놀려 놓으면 뭘 할 것 같아요? 대부분 쓸데없는 짓을 해요. 술 먹으러 가자. 고기 먹으러 가자. 만날 이런 거 하는 거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 욕이나 하고.(웃음) 놀려 놓으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별로 좋지도 아니한 것들을 막 하는 거예요. 마음으로는 과거에 누가 나한테 잘못한 것들을 끌어들여가지고 막 신경질내고 화내고, 이게 다 감옥이죠. 입으로는 누구 흉이나 보고 험담이나 하고 이게 다 감옥인 거죠. 몸으로는 해야 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빈들빈들하고 딴 짓거리하고. 이게 다 감옥이죠. 다 번뇌로 이루어지는 것들이에요. 

예를 들어서 지금 상황은 술을 먹어야 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술 먹으면 안 돼요. 그럼 지금은 뭐 해야 돼요? 지금은 여기 앉아서 얘기하고 들어야 해요. 지금은 얘기하고 듣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거 말고 다른 것을 하면 다 망상인 거예요. 그런데 술이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하겠어. 그래서 술 먹으려고 온갖 궁리를 한다. 그럴 수 있잖아요. 이게 망상이고 번뇌인 거죠. 이럴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술이 먹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하겠다’라고 하는 번뇌의 감옥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즉각 정신차려서 노는 입에 염불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마음으로 ‘관세음보살’하고 생각한다. 입으로 ‘관세음보살’하고 부른다. 염불 하겠다 마음먹고 하는 거니까 그래도 정중하게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입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몸으로 ‘관세음보살’ 부르는데 집중하는 것. 마음먹고 하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아, 술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 하겠네’하면, 이 때 나는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한 놈일 뿐인 거예요. 왜냐면 인간이란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되는 거니까. 아무리 법당에 앉아 있어도 소용없어요. 가부좌하고 앉아 있어도 소용없어요. 아무리 참선하고 기도하고 있어도 소용없고요.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하겠네’라고 하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 순간은 법당에서 가부좌하고 기도를 하던, 절을 하던, 참선을 하던, 뭘 하던 그냥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 돼요. 실제로 대부분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 안 하려고 했는데도 그렇게 됩니다. 

그럴 때 얼른 정신 차려서 ‘어, 이거 아니지’, 그러고 ‘관세음보살’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부릅니다. 관세음보살을 지극하게 생각하고 부르려니까 몸도 거기에 맞게 집중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거 마음먹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술 먹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할 인간이었는데 ‘어, 이거 안 돼지’ 하고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데 집중한 태도를 견지하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될까요? 바로 술 먹고 싶어 환장한 놈에서 벗어나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사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기 위해 집중하는 사람이 되죠. 술 먹고 싶어 미치고 환장한 인간에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인간으로 태어나면 이건 환골탈태한 것 아닌가요? 한 순간도 시간이 걸리지 않고 즉각 효과가 나타나요. 늘상 되냐, 안되냐는 여러분들이 계속 하냐, 안 하냐의 문제예요. 안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면 하는 만큼 반드시 즉각즉각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해도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고 또 잘못 알고 잘못 믿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도 해요. 그러기 때문에 계속 뭔가 죽어라고 하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바로 즉각즉각 되고 있습니다. 마음먹고 생각하고 말하고 또 거기에 지극하게 몸과 마음을 집중하기만 하면 즉각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불교는 모든 것이 즉각 된다고 해요. 제대로만 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루어진다. 바로 증명된다. 그래서 불교가 훌륭하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가 희망의 종교라고 이야기하고 불교를 하면 행복해진다고 하는 거예요. 즉각즉각 되기 때문에 신이 나죠. 하는 만큼 바로바로 이루어지는데 왜 재미가 없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현실을 그렇지가 않지요. 10년, 20년을 해도 기대한 것처럼 안 돼요. 그러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노래 가사를 보니까 이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뭘 해야 하죠? 법성게를 해야죠. 법성게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것도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망상이죠. 왜냐하면 법성게 이야기를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지만 비록 법성게의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법성게 내용이었어요. 형식은 우리가 딴 짓거리를 한 셈인데, 내용을 보면 법성게 내용을 더 평범하게 더 일상 속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얘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4.
자, 그러면 오늘은 교재 35쪽을 읽어보겠습니다. 지난번에 한 데까지 읽겠습니다.

 

‘여기 한 사람 있으니 그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인드라망 무늬입니다.

이 두 마디로 표현되어진 것을 그림으로 그린 거예요.

 

천 년 전에도 저 모습이었고 천 년이 지난 오늘도 저 모습이고 앞으로도 저 모습이라는 것이죠. 이 말이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네’ 이렇게 표현되는 거죠.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진 적 없고.’ 모든 존재는 그물의 그물코처럼 전부 다 연결되어 있죠. 이것이 내 인생의 진면목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것 하고 관계없이 나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 그림에서 제일 아래 있는 사람이 나인데, 저것만 떼어내어서 ‘나는 이렇게 생기고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하고 그렇게 알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까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으로만 그렇지 실제는 나만 떨어져서 내 인생이 따로 있을 수가 없어요. 실제가 그런데도 우리는 실제와 완전히 어긋나게 알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서 우리가 길을 잃고 있는 겁니다.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본래 정해진 모습도 없으니.’

 

제가 도법인데요, 제가 도법이라는 것은 알지요? 본래부터 도법이었겠어요? 누가 만들었겠어요? 본래는 이름이 없었어요. 본래는 그냥 한 존재가 있을 뿐이죠, 인연으로 이루어진 한 존재. 거기다가 사람들이 도법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 거예요. 다른 이름을 붙이면 될까요, 안 될까요? 필요하면 다른 이름을 붙여도 관계없어요. 또 행위 하는 것에 따라 이름이 달라져요. 도둑질 하면 뭐라고 해요? 도둑놈이라는 이름이 붙어요. 사기 치면 사기꾼이라는 이름이 붙고. 역할에 따라서 이름이 붙는 거잖아요. 그래서 ‘본래 정해진 이름이 없고’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저 중에서 제일 밑에 것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끼리의 약속이에요. 본래는 사람이라는 이름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죠. 본래는 그런 것이 없어요. 저 중에서 밑에 것만 떼어내서 ‘나’라고 하는 것, 이것도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에요. 실제로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래서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따로 정해진 모습도 없다.’라고 했어요. 도법이라고 하는 인간도 정해진 모습이 있습니까? 열 살 때하고 스무 살 때,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긴 한데 열 살 때는 아이잖아요, 스무 살 먹으면 청년이고. 모양새가 다르죠. ‘도법’이라는 이름으로 정하는 것은 인간들이 필요에 따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실제하고 관계없이 그렇게 규정하는 거예요.


‘그 내용은 오로지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그 밖에 다른 길이 있지 않네.’

 

(탁자 위의 물컵을 집어들다가) 어, 컵에 물이 없네? 다들 물이 있는 줄 알았죠? 저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게 착각이에요.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대중: 하하하.) 이런 것을 업대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습관대로 한다는 거죠. 습관대로 하는 한, 업대로 하는 한 우리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길이 없어요. 업대로 하지 않고 정신 차려서 실제대료 해야죠. 지금 사실을 확인 해보니까 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없어요. (물을 가져오고 나서) 만일 습관대로 했으면 물을 마실 수가 없죠. 정신 차려서 실제대로 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 됐지요. 그랬잖아요.

 

제가 지금 물을 마셨는데요, 이 물이 시원할까요, 시원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실제 해본 저만 알 수 있죠. 이 얘기가 그 얘기예요.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여타의 다른 길이 있지 않다. 직접 해보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도 닦아서 깨달으면 도인이 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말로는 그럴듯하죠. 그래서 ‘그 분은 도인이야’라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업자득이라고 그랬어요.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된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행위 하는 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는 그냥은 알 수가 없어요. 직접 해 봐야만 알아요. 우리는 저 사람 도인인데? 이렇게 알고 믿었어요. 그런데 만일 행위 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인은 도둑질해도 도둑놈 안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행위 하는 대로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도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도둑질을 하면 그 사람은 그냥 도둑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복잡한 설명 필요 없이 직접 실천하는 것을 보면 바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다른 길은 있지 않네.’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법성게의 전부이고, 화엄경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부연설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니.’

 

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니까 물이 그릇 따라 모양을 바꾸는 것과 같은 거예요. 물이 네모난 그릇을 만나면 네모난 모양을 하고, 세모 그릇을 만나면 세모 모양이 되고. 인생도 그렇게 정해진 것 없이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예요. 정해진 이름도 없고 정해진 모양도 없다는 거죠.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가 또한 그러하네.’

 

저 그림에서 네 발 달린 짐승이라고 하는 그물코를 쫙 끌고 가면 어때요? 다 따라오죠? 저 쪽에서 보면 뭐가 보여요? 네 발 달린 짐승만 보이는 거예요. 네 발 달린 짐승이 그대로 전 우주처럼 되는 거죠. 네 발 달린 짐승이 곧 그대로 우주다, 이렇게 얘기가 되는 거죠. 반대로 이쪽 물고기 그물코를 쫙 끌고 오면 어때요? 전체가 물고기로 딸려오는 거예요. 물고기가 곧 우주요, 이렇게 되는 거죠. 인간이라는 그물코, ‘나’라고 하는 그물코를 들면 어때요? 전체가 나라고 하는 그물코를 따라오게 돼 있죠. 이런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이것은 공간적 입장에서 나의 참모습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대로 지금 여기 한 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 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 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 따로 이뤄지네.’

 

이것은 시간적 입장에서 나의 참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보면, 앞에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이것은 공간적 입장에서 지금 여기 나의 진면목을 설명한 것이고 그 다음에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은 시간적 입장에서 지금 여기 나의 진면목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니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이것은 공간적 설명입니다.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대로 지금 여기 한 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 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 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따로 이뤄지네.’ 이것은 시간적 설명이죠. 지난달에 여기 까지 읽었는데 오늘 설명을 조금 더 해본 겁니다. 

 

5.
38쪽에 가면 그림이 세 개가 있죠? 첫 번째가 법성게 첫 구절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이것은 공간적으로 무한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것은 시간적으로 영원을 나타냅니다. 무한과 영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첫째 원상이죠. 우리의 생명은 이렇게 무한하고 영원하다, 이런 얘깁니다.

 

이 그림을 놓고 보았을 때, 시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80년 전에 태어나서 내 인생이 시작되고 80년쯤 살다가 내 인생이 끝나서 죽게 됩니다. 하지만 이 그림으로 봤을 때 시작이라고 하는 의미의 태어남과 끝이라는 의미의 죽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그런데 왜 시작으로서의 태어남과 끝으로서의 죽음이 있다고 믿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시작으로서의 태어남이 있다고 생각해서 태어남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끝으로서의 죽음이 있다고 생각해서 죽음은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태어나면 웃고 죽으면 곡을 하고 그러잖아요. 다 무지와 착각의 결과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실제로는 이 원상 같은 겁니다. 시작으로서의 태어남과 끝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 망상, 번뇌가 만들어낸 것일 뿐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이 무지와 착각으로부터 깨어나자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거예요.


두 번째는 뭐예요? 점이 세 개 있죠? 이것은 불, 법, 승을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이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은 영원과 무한의 존재인 생명, 영원과 무한이라고 하는 지금 여기 나의 참모습, 이 내용대로 삶을 잘 알고 살아간 사람이 부처님이에요. 두 번째, 이 내용대로 잘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뭐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세 번째, 이 가르침 내용대로 삶을 살고 이 가르침 내용대로 이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불교인들의 모임 즉, 승가공동체이죠. 요즘 우리는 사부대중 공동체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두 번째입니다. 이것은 조계종단을 상징하는 표시죠. 

제일 아래 그림은 뭘까요? 이런 내용을 일반화 시킨 겁니다. 기독교도 할 수 있고, 불교도 할 수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할 수 있고, 종교가 있는 사람도 할 수 있고, 동양 사람도 할 수 있고, 서양 사람도 할 수 있고, 진보도, 보수도, 좌파도, 우파도,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누구나 다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세 번째 것이죠. 원래 원상은 안 넣었었는데 이것을 불교 쪽에 좀 친하게 하려고 원상을 넣은 거예요. 이것이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예요. 이것을 잘 보면 법성게의 내용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설명한 것까지가 우리가 알아야 될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고요, 그 다음은 능인 즉, 석가모니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삶을 살아가니까 ‘그 삶이 좋더라’하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누구예요?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라고 표현되었는데,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들이죠. 부처님이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니까 참 좋았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가자는 내용이 시고행자(是故行者) 그 뒤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또는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보니까 참 좋더라. 석가모니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니까 좋았듯이 우리도 이제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자. 왜? 그렇게 살면 좋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법성게라는 거죠. 일단 여기까지 하고 다른 설명을 좀 더 하겠습니다.

 

 

6.
우리 인생은 흐르는 강물, 그보다 더 정확하게 비유를 들면 망망대해 같은 거죠. 우리의 생명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바다처럼 활동하고 있다. 어떻게 흘러가고 활동하고 있는가?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흘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활동하고 흘러가는데 그 삶이 괜찮을 것인가, 괜찮지 않을 것인가는 누구한테 달려있는가? 본인한테 달려있다는 얘깁니다. 본인이 ‘인생이란 강물 같은 것이구나.’ ‘인생은 바다와 같은 것이 구나’ 이것을 잘 알고 거기에 주체적으로 잘 적응하고 활용해서 살면 그 삶은 괜찮은 삶이 됩니다. 그것을 모르고 그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삶은 늘 고달프게 되는 거죠. 죽음이 늘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죠. 반면 변화활동, 순환활동이 있을 뿐 끝으로서의 죽음이란 본래 없다라는 사실을 잘 알면 죽음이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죠.


이것을 작품으로 잘 표현한 것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라는 책입니다. [싯다르타]는 조그만 책이니까 가능하면 읽어보시면 좋겠어요. 특히 나이 드신 분들. 거기에는 인생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뱃사공인데 후계자한테 뱃사공 일을 넘겨주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난 살만큼 다 살았어. 나 이제 갈게. 잘 있어.’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유유히 떠나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숲 속으로 갑니다. 숲 속으로 간다는 것은 바로 죽으러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내는 사람도 ‘그래, 그 동안 참 애썼소. 참 잘 살았소. 잘 가시오.’ 이렇게 보냅니다. 굉장히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죠?

 

죽음은 나쁜 거야. 죽으면 끝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태어나서 사는 것이 생명활동의 하나인 것처럼, 강물 흐름의 하나인 것처럼, 바다 파도의 하나인 것처럼, 죽음도 강물 흐름의 하나야, 바다 파도의 하나야. 이렇게 죽음을 잘 알고 보면 사실은 그렇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되는 거죠. 그래, 난 파도 노릇을 할 만큼 했어. 잘 했어. 난 이제 바다로 돌아갈 거야. 숲으로 간다는 것은 이런 거잖아요. 삶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소화시키면 우리 삶은 그야말로 바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마치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가듯이.

 

어떻게 생각되세요? 인생을 그렇게 살면 좀 괜찮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살다가 떠나면. 떠나는 사람도 괜찮고, 보내는 사람도 괜찮고. 젊은 사람들한테는 이것이 별로 실감나지 않을 거예요. 나이 많은 분들은 보시면 대단히 도움이 될 겁니다. 저도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그 정도인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최근에 그것 가지고 공부하자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봤어요. 다시 보니까 놀랍게 잘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법성게를 잘 설명한 책, 화엄경을 잘 설명한 책, 인생을 잘 설명한 책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권하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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