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생명공동체 소식지 '월간 인드라망' 귀농탐방 꼭지를 위해 서정홍 선생을 만났다.
주인공은 서정홍 샘이 소개해준 김예슬 청년 농부. 4년차에 들어선 젊은 (여성)농부이다. 그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고 농부로 살아간 과정들을 들어보았다. 20대 중반쯤이다. 말은 천천히 느리게 하고 여려 보이지만, 내면은 단단하게 뭔가로 차 있다는 느낌이었다.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멋져 보이기도 하고. 질투가 나는 게 있었다. 글도 잘쓰고, 글씨(캘리~)도 잘쓰고, 서각도 하고, 커피도 내리고, 빵도 굽고, 농사까지 하고! 

청년농부라 불리는 게 좋다고 한다. 내공을 쌓아서 농부 시인으로 불리고 싶단다. 쭉 꽃길을 걷기를 빌어주고 싶다.^_^

자세한 건 6월에 나올 인드라망 소식지에 싣는 걸로 하고.^^

인터뷰 마치고 서정홍 샘 밭에 들렀다. 박하밭에서 서정홍 샘 아내 님(?)께서 풀을 뽑고, 박하를 거두고 계셨다.

사진 속 울타리 너머는 뭘까?
이게 바로 밭 울타리였다. 감성 넘치는 농부의 밭울타리라면 이쯤은 되어야지 싶다.ㅎㅎ

#맨 밑 사진은 김예슬 청년농부와 밭에서 얘기나누는 모습을 함께간 인드라망의 소울메이트께서 붙잡아 남겨주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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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 심심학교를 소개해 보고 싶다.

인드라망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드라망생명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다.

먼저 참고가 될 만한 글을 담아두고 곱씹어 가면서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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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퍼온 글을 조금 다듬어 보았다.

   다시 보며 다듬다 보니, 아래 글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니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 일은 모두 위대한 일인 것입니다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든 그 일을 소중히 대하자는 말씀입니다나의 작고 사소한 행동일 하나가 전체인 세상에우주에 영향을 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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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불교 용어 중에 '인드라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드라망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그물로서 끝없이 서로서로 얽혀 있는 세계를 비유한 말이랍니다. ‘인드라라는 그물은 한없이 넓은데, 그 그물의 모든 매듭에는 구슬이 달려 있대요. 그 구슬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를 비추지요. 마치 인간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를 비추듯이.

인드라망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서로 얽히고설키었음을 말해준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관계도 이러함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인간을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 우리 몸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면, 세포 단위의 유전자들은 인드라의 그물 매듭에 달린 구슬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구슬이 거미줄처럼 얽혀 서로를 비추면서 상호 보완하는 것이 인체라는 우주가 될 것입니다. 구슬인 세포 단위의 유전자들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죠. 인간 세계라는 우주 속에서 한 개인은 인드라 그물에 달린 하나의 구슬과 같습니다.

인드라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인드라망의 구슬 하나가 변하면 인드라망 전체가 변한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인드라망의 세계가 변하면 하나의 구슬도 영향을 받아서 변하게 된다고 봅니다. 작은 것은 전체에 영향을 주고 전체는 작은 것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우리 일상으로 가져와 볼까요.

전체인 몸에서 어떤 영향으로 정상이던 세포가 이상해지면 암세포가 된다고 합니다. 암세포는 자신의 생체 현상이나 주위의 조직 상태 등에 관계없이 급속한 발육을 이어 가게 됩니다. 암세포의 무제한 증식은 마침내 몸이라는 전체를 파멸시키고 맙니다.

 

전체인 몸은 세포에 영향을 주고 일부인 세포는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한 사람은 전체인 사회에 영향을 주고, 전체인 사회는 일부인 한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위대하고 큰일은 사소하고 작은 일에 영향을 주고, 사소하고 작은 일은 위대하고 큰일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내가 하는 하나의 행위는 위대할 수도 있고 사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위대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사소한 일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 일은 모두 위대한 일인 것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든 그 일을 소중히 대하자는 말씀입니다. 나의 작고 사소한 행동, 일 하나가 전체인 세상에, 우주에 영향을 끼칩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운명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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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불교 용어 중에 '인드라망'이라는 것이 있다.

인드라망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그물로서 끝없이 서로서로 얽혀있는 세계를 비유한 것이다.

인드라라는 그물은 한없이 넓은데, 그 그물의 모든 매듭에는 구슬이 달려 있다.

그 구슬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를 비춘다.

마치 인간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를 비추듯이.....

인드라망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서로 얽히고설키었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관계도 이러함을 말해준다.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착각일 뿐이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예를 들어, 인체를 인드라망이라고 한다면

세포 단위의 유전자들은 인드라의 그물 매듭에 달린 구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구슬이 거미줄처럼 얽혀 서로를 비추면서 상호보완하는 것이 있는 인체라는 우주가 될 것이다.

구슬인 세포 단위의 유전자들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세계라는 우주 속에서 한 개인은 인드라 그물에 달린 하나의 구슬과 같다.

 

인드라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인드라망의 구슬 하나가 변하면 인드라망 전체가 변한다.

마찬가지로 인드라망의 세계가 변하면 하나의 구슬도 영향을 받아서 변하게 된다.

작은 것은 전체에 영향을 주고 전체는 작은 것에 영향을 준다.

이것을 우리 일상으로 가져와 보자.

전체인 몸의 어떤 영향으로 정상적인 세포가 이상해지면 암세포가 된다.

암세포는 자신의 생체현상이나 주위의 조직 상태 등에 관계없이 급속한 발육을 계속한다.

암세포의 무제한 증식은 마침내는 몸이라는 전체를 파멸시킨다.

전체인 몸은 세포에 영향을 주고 일부인 세포는 전체에 영향을 준다.

마찬가지로, 일부인 한 사람은 전체인 사회에 영향을 주고, 전체인 사회는 일부인 한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위대하고 큰일은 사소하고 작은 일에 영향을 주고, 사소하고 작은 일은 위대하고 큰일에 영향을 준다.


내가 하는 하나의 행위는 위대할 수도 있고 사소할 수도 있다.

그것이 위대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사소한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 일은 모두 위대한 일이다.

그러니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하든 그 일을 소중히 대하자.

나의 작고 사소한 행동, 일 하나가 전체인 세상에,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운명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다.

[출처] 인드라망|작성자 무위자연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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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노래한 시


친구라는 게 참 묘하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싱겁기만 하다. 

아니 늘상 만나는 아저씨 아줌마와 다르지 않다. 좀 편하기는 할지라도...

아니 그래서 편하지 않았다.

진짜 친구가 있는 걸까?

아마 친구 같은 존재를 친구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친구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들 친구를 노래하는지도 몰라


덧 1.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참 좋기는 한데, 언뜻언뜻 남성 중심적인 냄새가 배어 있는 듯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남성들에게 친구는 어떤 느낌이고, 여성들에게 친구는 어떤 느낌일까?

다르기는 할 것이고, 사회적으로 다른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기도 하고....

어떤 게 진실일까? 틀 안과 밖의 경계를 들여다보기가 쉽질 않아!



덧 2.

간밤에 시 몇 편을 찾다가 박노해 시가 들어와서 몇 편 덧붙인다.


덧 3.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몇 편을 만났다.

그는 1923년에 태어난 폴란드 시인이다. <끝과 시작>이라는 책에서...


덧 4. 

시 순서를 바꿨다.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들 가졌는가>를 맨 앞으로 모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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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사회 운동가이며 종교사상가, 1901-1989)





<벗의 노래>
                       _정연복


홀로는 이슬 하나의
무게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작고 여린 꽃잎들이

층층이 포개어지고 
동그랗게 모여 
이슬도, 바람도 너끈히 이긴다

하나의 우산 속에
다정히 밀착된
두 사람이

주룩주룩 소낙비를 뚫고
명랑하게 걸으며
사랑의 풍경을 짓는다

가파르게 깊은 계곡과
굽이굽이 능선이 만나서
산의 너른 품 이루어

벌레들과 새들과 짐승들
앉은뱅이 풀들과 우람한 나무들
그 모두의 안식처가 된다

나 홀로는 많이 외로웠을 생(生)
함께여서 행복한  

참 고마운 그대여,
나의 소중한 길벗이여


(정연복·시인, 1957-)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정말로 좋은 친구>


그들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그들은 짓궂은 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지만,

또 전혀 놀지 않고도, 전혀 말하지 않고도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기 때문이다.


(장자끄 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서)




<첫 마음>

                     - 박노해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 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 마음으로




<내가 나선 이유>

                     - 박노해


솔직히 나는 내 죄를 안다

나도 거품이었고 부실했다

나는 지금 누구도 탓하지 않고

내 일생을 바쳐 쌓아온 것들이

발 밑에서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이건 분명 내 탓이다

나의 불찰이고 나의 무능이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임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슬프다

이것이 내 노여움이다


이 모든 걸 내 죄로 알고 받아들이는 게

너를 조금도 참회시킬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거다

너는 어제도 오늘도 그러한 것처럼

내일 다시 숱한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미치게 하고

한 순간 통째로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너희들이 떠넘긴 이 큰 죄와 고통이

고스란히 우리의 미래로 떠밀렸을 뿐이라는 것

그것이 나의 슬픔이고 나의 분노이다

그것이 내 탓이다 내 가슴을 치면서도

너를 향해 내가 나서는 이유이다




<나에게 던진 질문>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 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 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끝과 시작>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최성은 옮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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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인드라망 소식지에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반GMO 생명연대'라는 곳을 찾았다.

덕분에 GMO 공부를 좀 하게 되었다. 

취재 인터뷰에서 일부러 GMO 찬성의 입장에서 써놓은 글들을 중심으로 질문을 던졌는데, 사이다 같은 시원한 답을 듣지는 못해서 아쉬웠다. 그래서 자료를 보고 찾고 하면서 공부해서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아래 자료도 좀 일찍 봤더라면 더 참고가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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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O 진실 혹은 거짓
[살림이야기] GMO쌀 상용화 반대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는 '생명공학기술을 이용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유전적 형질(DNA)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만든 생명체'로 정의할 수 있다. 이미 우리 농업과 식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데도 일상생활에서는 체감하기 어렵다. GMO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자.

유전자 '변형', '재조합' 또는 '조작'

한국 법률에서는 GMO를 '유전자변형'과 '유전자재조합'이라는 용어로 쓰고 있다. '유전자변형생물체'(유전자변형생물체의 국가 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 '유전자변형농수산물'(농수산물 품질관리법, 양곡관리법), '유전자재조합식품'(식품위생법) 등이다. 한편,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성질'을 '인위적으로 바꾼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유전자조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GMO를 LMO(Living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자체 생물이 생식·번식 가능한 것으로 기존 GMO에 '살아 있음(Living)'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전혀 다른 종의 유전자를 결합해 만든다 

농작물을 자연적으로 교배시키는 등으로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것을 '육종'이라고 한다. 방울토마토, 슈퍼옥수수, 씨 없는 수박, 통일벼 등이 이에 속한다. GMO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작물을 개량한다는 측면에서 GMO 또한 전통적인 육종기술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종이나 아주 가까운 종만을 대상으로 하는 육종과 달리 GMO는 자연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세균, 바이러스, 다른 식물이나 동물에서 추출한 유전자가 관계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살림이야기 

 
 

제초제에 견디고 해충도 이긴다고? 

① 제초제 저항성 GMO 

가장 강력한 제초제는 글리포세이트 계열로, 식물에 대한 독성이 강해서 잡초뿐 아니라 농작물까지 위협하기 때문에 '식물 전멸 제초제'라고도 불린다. 기업들은 글리포세이트 계열 제초제를 뿌려도 죽지 않는 GMO 종자를 개발했다. 콩이 대표적으로, 글리포세이트 계열 제초제 '라운드업'을 가장 먼저 개발한 다국적종자기업 몬산토에서 이 제초제에 내성을 가진 GMO 종자 '라운드업레디'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 한편 지난 3월 세계보건기구는 글리포세이트 성분을 발암성 물질 2A 등급으로 분류해 발표했다.

제초제를 한두 번만 뿌리면 잡초만 죽고 작물은 죽지 않아 노동력과 생산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기업의 주장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제초제를 쓰다 보면 잡초도 내성을 가지게 되고, 결국 제초제 사용량은 늘어나게 된다. 또 제초제와 종자를 함께 써야만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기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② 해충 저항성(살충성) GMO  

땅속에 사는 '바실리우스 투린지엔시스(Bt)'라는 균에 살충제 효과가 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이 균에서 살충성을 지닌 유전자만을 뽑아내어 GMO 종자를 만들었는데, 면화와 옥수수가 대표적이다. 해충 저항성GMO가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균이 오랫동안 유기농가에서 사용돼 왔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균을 활용하는 것과 농작물 자체가 살충성을 지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또 특정 곤충에만 효과가 있으므로 다른 곤충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살충제를 뿌려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해충 저항성 GMO를 피하는 곤충들이 다른 농지로 이동해 해를 끼치지 않도록 농지의 10% 이상을 '곤충들의 피난처'로 만들어야 해서 농지이용률은 더 떨어지게 된다. 

콩·옥수수·면화·유채가 대표적 

2014년 현재 전 세계 28개국에서 GM작물이 재배되는데 콩, 옥수수, 면화, 유채(카놀라)가 주류를 이룬다. 2013년 기준 GM콩은 전 세계 콩 재배면적의 79%인 8450만 헥타르(ha)에서 재배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하여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대규모 영농으로 콩을 수출하는 나라들이 GM콩을 재배하기 때문이다. GM옥수수는 전체 재배면적의 32%인 5740만 ha, GM면화는 70%, GM유채는 24%에서 재배되고 있다. 한편 전 세계적 주곡인 밀은 GMO가 없다. 몬산토는 2002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GM밀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승인요청서를 정부의 해당 기관에 제출했으나 농민들과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사업 진행을 중단했다. 반면 한국 정부(농촌진흥청)는 지난 9월 초 GM벼 상용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되고 있다.


▲ 전세계 작물별 LMO 재배면적 비중. ⓒ살림이야기

 
 


▲ GM 작물별 주요 용도. 이들의 공통점은 식용유의 원료라는 사실이다. 콩, 옥수수, 면화, 유채의 알곡 또는 씨는 대표적인 식용유 원료이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식용유 중 이 네 가지를 원료로 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GMO이다. ⓒ살림이야기

 
 

▲ 품목별 GM작물 수입 현황(2014년도). 2014년 국내에 수입 승인된 식용·농업용 GMO는 총 1082만 톤, 31억2000달러 규모이다. 용도별로는 농업용 854만 톤(전체 수입량의 79%), 식용 228만 톤(21%)이다. 농업용은 주로 가축 사료용으로, 대규모로 경작된 GM작물은 대부분 사료로 쓰인다. GMO를 논의할 때 축산업을 포함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살림이야기 

 
 

건강, 생태계, 농업에 미치는 영향도 커  

① 식품 안전성 미흡 : GMO에 들어간 유전자는 대부분 미생물로부터 나온 유전자이다. 일반적으로 미생물을 먹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독성이나 알레르기 유발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식품은 사람이 먹는 것이므로 이의 안전성은 과학적 근거에 기초하여 완전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② 생태계 파괴 :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서 2007년 6월에 공개한 GMO의 유전자 이동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생태계에서 종의 다양성이 GMO의 유전자 이동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으며, 생물다양성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③ 종자 종속 : 종자는 농업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국적종자기업에서 GMO를 통해 종자 독점을 하면 결국 다양한 전통농업과 토종종자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참고 

 

<GMO 바로알기>(박수철·김해영·이철호 지음, 도서출판 식안연 펴냄)
<몬스터 식품의 숨겨진 비밀>(후나세 스케 지음, 중앙생활사 펴냄)
<유전자 조작 밥상을 치워라!>(김은진 지음, 도솔 펴냄)
<GMO의 법률상 용어 정의 및 관련 표시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박성용·강창경·정용수 지음, 한국소비자원)  
한국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 www.biosafety.or.kr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독자가 프레시안을 지키는 힘입니다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바뀐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정 사주나 지배집단에 좌우되지 않는 언론의 논조와 시각을 지켜 주면 좋겠다. 특히 협동조합은 개방적인 조직이니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겠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2013년 6월,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이 언론 협동조합이 됐습니다. <프레시안>의 기사에 만족하셨다면,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의 도전에 주목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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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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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기적, 그리고 나와 우리의 미래"

 

▷ 일시 : 2014년11월18일(목) 저녁 7시
▷ 
장소 : 에코팜(종로2가 YMCA 1층)
▷ 이야기 손님 : 도법스님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다르고 입장도 다르기에 말하기 쉽지 않지만, 저는 한국 사회의 통일 문제, 남북 문제를 푸는 데 있어 서로 편갈려서 불신하는 남남갈등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걱정하는 분들은 많이 계신 것 같은데 드러내 놓고 이야기해 보자 하는 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북한 문제를 많이 다루는 분들은 계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지리산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2000년 초부터 지리산운동을 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남남갈등 또는 남북분단의 문제 이런 문제를 풀어 가려면 관계된 구성원들이 어떤 형태로든 만나고 대화하고 때로는 미안하다고 이야기도 좀 하고 잘못했다고 이야기도 좀 하고 이래야 문제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모여진 것이 생명평화운동입니다. 생명 평화를 주제로 하면 누구나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생명 평화는 진보냐 보수냐 관계 없지 않습니까? 남이냐 북이냐도 관계 없고 친미냐 반미냐, 친북이냐 반북이냐도 관계 없을 것 같고 노동자냐 자본가냐? 기독교냐 불교냐? 이런 것들을 넘어서서 만날 수 있는 가치잖아요. 남북문제는 좌우의 극단적인 대립인데 이 문제를 던져 놓고 이야기 해보자. 그러면 우리가 쌓아 놓았던 벽을 넘어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루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해서 그 운동을 쭉 해왔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그럽니다. 

“네 색깔이 무어냐?” 묻는 사람도 있고 “네 정체성이 도대체 뭐냐?”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회색분자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네 행보는 도대체 뭐냐?”, “나는 갈 지(之)자 행보다. 나는 회색분자고 갈지자 행보를 하는 사람이니까 여기가든 저기가든 그냥 좀 놔둬라.” 하고 말합니다.

지금 어쨌든 제가 알고 있는 수치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재판 건수가 대략 630만 건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60배입니다. 또 갈등으로 인한 손실이 약 300조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도 누가 자료를 줘서 보니까 우리 사회에 믿을 구석이 없다는 불신의 수치가 어마어마하게 높더라고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깨진 것이지요. 재판 자리에서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재판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말하면 모두가 싸움의 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300조에 이른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부분이겠지요. 


“싸우는 사람은 있는데 싸움을 말리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은 국가 체계로 보면 정부가 또는 정치인들이 해야 할 몫인데, 그런데 정부도 싸움의 당사자가 되어있습니다.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계속 국론을 분열시키고 대립하게 만듭니다. 대부분 보면. 정치인들도 그런 것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싸움판이 있으면 이것을 말라고 풀어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싸우는 사람은 있는데 싸움을 말리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 뭐하냐 물으면 “세력분자를 세력화하는 것이 내 관심사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면서 우리 문제를 다루고 풀어가는 사회가 좀 그렇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가져단 준 것들.

세월호 문제 참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 일이 정쟁거리로 갑니까?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정부가 못해주니까 유족들이 진실을 알고 싶다고 들고 나온 건데, 정부가 못하면 국민이라도 나서서 그것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유족들은 지금 너무 힘든 상황이니 우리가 나서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들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 세월호 사건이 난 것도 기가 막힌 일이지만 이렇게 유족들이 거리로 나서게 만든 우리 사회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부가 나쁘다고 백날 이야기 해봐야 입만 아프고 한국 사회도 보면서 참 큰일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세월호 현상에서 중요한 몇가지 생각들을 했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세계관, 가치관, 삶의 방식 한국 사회의 구조나 풍토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 이런 것들이 다 담겨 있는 게 세월호 사건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월호가 우리의 문제도 다 드러나게 했지만 동시에 우리의 문제를 푸는 길도 다 내놓았다고 봅니다. 문제를 드러나게도 했지만 문제의 해답도 보이게 내놓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고 봅니다.

사건의 현상만 놓고 보면 특별법 만들어서 법적으로 다루는 것도 그것대로 잘 해가야 한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족들이 원하는 대로 특별법을 만들고 법적으로 다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할 수 있는 한계는 뻔하다고 봅니다. 세월호가 드러낸 문제가 무언지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법적으로 물을 것만 묻고 있는 것이지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나 가치 의식이나 사회 방식이나 또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나 관행적인 문제들 풍토적인 문제들을 다 드러낸 사건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법적으로만 다루어서 다 짚어질 일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들 본질적인 문제들이 있는 것이고 어쩌면 세월호 문제는 그렇게 갔어야 맞는 일인데 특별법 문제에 꼬여서 - 물론 이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기본적인 것인데 - 거기에 다 소진해 버린 느낌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국론 분열을 불러오면서 말입니다. 

세월호 문제가 그런 총체적인 문제를 다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정말로 아주 본질적인 문제부터 현상적인 문제까지 정확히 짚어내는 일이 문제를 풀어내는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법적으로 하는 것은 법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만 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문제를 잘 짚어내면 해답은 거기서 나오리라고 봅니다.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에서 몇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제 역할을 할까 합니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반응이 몇가지로 표현이 되었었지요. 그중에서 이런 표현이 중요하게 생각되더라고요. 

“제발 살아있어만 다오”, “제발 함께 있어만 다오” 이런 반응. 평소에는 내 마음에 드냐 안드냐 나하고 친하냐 안친하냐 나에게 이익이 있냐? 없냐?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 또 엄마 아빠는 내 말을 잘 듣냐 안 듣냐? 이런 것들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는 그런 것 보다 더, 그 이전에 또는 그것을 넘어서 내 딸로 내 아들로 내 친구로 내 이웃으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될 한 사람으로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잖아요. “살아 있어만 다오 제발 함께 있어만 다오” 그 외에는 다 두 번째 문제인 것이지요.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 내 마음에 드냐 안 드냐 나랑 친하냐 안 친하냐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 그런 것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내 아들, 내 딸, 내 친구, 내 이웃,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할 구성원, 한 인간으로 살아 있어만 다오 하는 그 마음은 어떤 것보다도 생명을 가진 한 인간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각성은 놀라운 것이라고 봅니다. 온 국민이 함께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이런 부분들은 세월호가 우리에게 준 기적적인 선물이라고 봅니다. 

세월호 사건이 왜 일어났습니까?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사람보다 권력, 사람보다 명예, 사람보다 출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원인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온 국민이 ‘아 우리가 그동안 그것을 잘 몰랐었구나 잘 못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돈 보다도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재산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이란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인간 존재 가치에 대해서 온 국민이 눈을 뜬 사건. 전 이것은 정말로 그분들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씀이겠지만 ‘세월호가 우리에게 준 기적적인 선물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같은 맥락이지만 “미안해”, “잘못했어”, “이제 달라질게” 그런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어떤 말이겠어요, 아까의 그 이야기와 연결되는 맥락입니다. 네가 내 아들로, 내 딸로, 내 친구로, 내 이웃으로 동반자로 사는 것 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왔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미안하다는 이야기잖아요. 내가 잘 모르고 살아왔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이제 달라질게, 새로워질게 이게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모르긴 몰라도 진보다 보수다, 노동자다 자본가다, 관이다 민이다, 여다 야다. 경상도다 전라도다. 이런저런 이유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데 그 사건을 대하고 국민들이 일으킨 반응은 사실은 거의 다 같았죠 온 국민이 같은 마음이었죠. 

그리고 그 다음엔 
"잊지 않을게, 기억할게, 헛되지 않게 할게 값지게 할게. 세월호 이전의 나와 대한민국하고 세월호 이후의 나와 대한민국이 반드시 달라지게 할게" 하는 다짐이 있었습니다. 

그 반응들을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특정인들만 그렇게 반응한 게 아니라 온 국민이 그랬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함께 하는 현상을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다 편 가르고 있었지요. 붉은 악마 현상 같이 그나마 크게 논란 없이 온 국민이 함께 했던 것이지만 그것은 민족 감정, 경쟁심, 승부욕 같은 것이 건강하게 분출된 현상이었습니다. 세월호는 그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친분 관계가 없는 누군가의 슬픔, 고통, 문제를 마치 나의 슬픔처럼, 고통처럼, 문제처럼 온 국민이 함께 한 현상입니다. 전 이 현상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봅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누군가의 고통을, 누군가의 아픔을 나의 슬픔으로, 고통으로, 문제로 한 것이 바로 거룩한 마음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 인간적인 마음이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이 있을까? 참으로 이것은 인간적인 마음, 아름다운 마음, 거룩한 마음입니다. 짧은 시간이다 하더라도 온 국민으로 하여금 이렇게 거룩한 마음을, 인간다운 아름다운 마음을 일으키게 한 것이 세월호 사건인데 이건 기적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저는 세월호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말이 생겨서 욕도 얻어먹고 곤란해지니까 주변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10년은 천착해야 하는 세월호 문제

저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 문제에 적어도 10년은 천착(穿鑿)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속담에 “귀신은 무서워하면 자꾸 덤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편한 것을 피하지 말고 마주해서 이를 풀어내야지 이를 자꾸 피하면 계속 불편한 상황에서 달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힘들고 불편한 것은 피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힘들고 불편하다고 자꾸 피하면 계속 그런 상황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정직하게 맞이하고 정직하게 풀어내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가 던진 화두를 붙잡고 10년은 천착을 해야 지금 다짐한대로 세월호 이후의 나와 대한민국이 달리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달라진다는 게 그리 간단할 턱이 없지 않습니까? 온 국민의 누군가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처럼 함께 했다는 사실 이것이 세월호가 우리에게 준 첫 번째 기적의 선물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그 기적을 실현해 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못할게 뭐 있겠습니까? 저는 온국민이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통일도 남북 문제 풀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거기에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기독교냐 불교냐 하는 벽도 허물어졌고, 여냐 야냐 하는 벽도 허물어졌고 관이냐 민이냐 하는 벽도 허물어졌고 진보냐 보수냐, 자본가냐 노동자냐 경상도냐 전라도냐 하는 벽도 허물어 졌습니다. 모든 벽을 넘어선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모든 벽을 허물고 서서 사람으로 구성원으로 만나고 함께 했던 이런 내용을 나의 이익이냐 편의냐 이런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 누군가의 슬픔, 누군가의 문제를 나의 슬픔처럼, 아픔처럼, 문제처럼 함께 했던 그 고귀한 마음들을 어떻게 생활화할 것인가 이것을 어떻게 사회화 할 것인가가 나머지 과제라고 봅니다. 만약에 그 거룩한 마음이 한사람 한사람에게 생할화되어질 수 있고 사회화 되어 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의 실현이라고 봅니다. 그 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에 어디 가서 이야기 할 기회가 생기면 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 가슴으로는 세월호와 연결시키지 않고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세월호를 덮어놓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안될 것 같은 마음입니다. 저는 싸움은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그런 중간 지대가 탄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싸우고 있을 때 누가 말리면 못이기는 척하고 그만두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리는 이가 없으면 싸우다가 갑자기 그만둘 수도 없잖아요. 누가 안 말리면 그냥 계속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누가 강력히 말리면 그리고 설득력 있게 말리면 또는 힘 있게 말리면 못 이기는 척 물러서기도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기도 하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도 저는 그런 제3지대에 사람들이 힘 있게 있으면 좋겠다 그 길을 열어보자 해서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그러는데요. 


생명평화운동을 하는 이유



 


이 그림은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을 하면서 만들어진 그림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이루어진 곳인지 또는 인생이란 뭔지 나는 또 어떤 존재인지 내가 만나는 너는 누구인지 생명은 또 어떻게 생겼는지 이런 물음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될 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을지 이런 물음에 대한 그림설명입니다. 

인간이 알아야 될 것은 두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현대인들을 보면 가장 큰 문제가 자기 존재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존재에 대한 관심이 없으니까 당연히 자기존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요. 달리 이야기하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야 인생이 괜찮은가 하는 이런 물음이 없는 것이지요.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두가지 물음이지요. 그런데 다른 것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정도로 다른 것은 지식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것이지요. 막말로 이야기하면 무식한 것이지요. 또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다루는 능력은 대단히 출중합니다. 못 다루는 게 없을 정도이지요. 그런데 자기를 다루는 능력은 또 제로입니다. 자기를 다루는 능력은 무능력에 가깝습니다. 

‘무식하고 무능력하다’라는 질문을 던져 보면 현대인들은 대단히 무식하고 무능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 것인지 이 두가지가 인생에게 던져진 가장 중요한 화두라 할 수 있겠는데 현대인들의 경향을 보면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존재의 가치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게 마치 인생을 잘 사는 것처럼 거기에 다 골몰하고 있지요. 그것이 얼마나 자기 존재 가치를 형편없게 만드는지 그게 얼마나 삶을 파괴적으로 몰고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인간은 당연히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데 미안해하지도 않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따지고 보면 자기존재에 대한 무관심, 무지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 그림을 가지고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내 생명은 내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생명은 네안에 있고 내 생명은 내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는 너고 나는 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 없이 나 혼자도 살 수 있어. 여기서 더 나아가면 차라리 네가 없는 것이 더 좋겠어. 여기 사과가 하나 있는데 혼자 있으면 혼자 다 먹을 수 있지만 둘이 있으면 나눠 먹어야 되잖아요. 그러니 네가 없는 게 내게 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좀 더 가면 너 없애고 나만 하겠어.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경쟁의 상황이지요. 너를 없애고 나 혼자 하겠어. 이런 것이지요, 그것은 네 생명은 네안에 따로 있고 내 생명은 내안에 따로 있다는 이런 생각 이런 신념체계에 따르기 때문에 너 없이 나 혼자 살 수 있어 너 없는 게 더 좋아 너 없애고 나 혼자 하겠어 이런 것이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과 대립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실제로 없습니다. 분리 독립되어서 따로따로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이나 말이나 글로만 가능하지 실제로는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거북이털, 토끼뿔 같은 것입니다. 토끼뿔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있지요. 말로도 할 수 있지요. 글로도 쓸 수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 토기는 뿔이 없습니다. 그건 그냥 관념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으로 있는 것, 말로 있는 것, 글로 있는 것이 진짜 있는 것처럼 믿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예로 짚어 보면 한국 사회에서 1등이 최고야 부자 되면 행복해 이런 놀이인 것이지요. 정말 1등이 최고인가? 정말 1등이 되면 희망이 있는 것일까? 정말 부자가 되면 좋을까? 부자는 행복할까? 생각이나 말이나 글로는 그럴 것 같지만 실제로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대단히 위험한 거짓말이지요. 대단히 나쁜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이게 진짜인 것처럼 사람들은 다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요즘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너 커서 뭐 될래? 물어 보면 65%가 부자되겠다고 합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 아빠가, 삼촌이 선생님이 어른들이 부자가 좋은 거라고 하니까 부자 되면 행복한 거야, 너도 부자되야 해라고 말하고 새해 덕담도 이렇게 바뀌지 않습니까 새빨간 거짓말을, 나쁜 거짓말을 어른들이 진짜처럼 믿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거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렇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면서 이 사회가 어떻게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바랄 수 있을까? 이러면서 어떻게 인간다운 사회가 가다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건 도저히 인간다울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대다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합니다.


자, 이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태양이 없는 지금 내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이 없으면 나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냥 현상으로만 보면 태양과 나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없으면 여기의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처도 별 수 없고 예수도 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태양과 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물의 그물코들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되어 있고 서로 관계 맺고 있고 서로 영향과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존재합니다. 온 우주의 시간, 공간, 유형, 무형, 내면, 외면, 정신, 물질, 인간, 자연 어떤 형태로 표현되어 지던 분리독립되어 따로따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관념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실제는 그런 거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존재도. 태양과 나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그 여타의 모든 관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내 생명은 나 아닌 다른 것들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 제외시켜 놓고 보면 나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의 살이있는 그물이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떻게 생겼는가? 현대과학에선 생명그물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의 살아있는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 낱낱의 존재들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어있고 의지하고 관계맺고 도움을 주고 받으며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렇게 생명의 실제 내용을 확인해 보면 전부 연결되어 있다면 세상에 내 생명 아닌게 있겠습니까? 여기 물이 있는데 물과 내 생명을 놓고 봤을 때 어떤게 더 중요하겠습니까? 당연히 습관적으로 인간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 하지요. 그런데 물이 없는 인간의 생명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물이 곧 인간의 생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게 분리되어 있으면 가치의 우열을 이야기 할 수가 있는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만 더 중요하고 물의 가치는 별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진실은 세상은 함께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산다는 것! 이게 온 우주의 존재법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길은 함께 사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함께 사는데 인생을 걸어본 적 있십니까? 기독교인들이 평화를 이야기 할 때 불교인들을 포함시키겠습니까? 당연히 안하지요 불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현상이 뭡니까 종교전쟁이지요.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자고 이야기는 합니다. 그런데 온통 내막을 들여다 보면 패거리 싸움입니다. 국가란 이름으로, 종교란 이름으로, 민족이란 이름으로, 지역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또 다른 이해타산으로 패거리싸움을 하교 있습니다. 나와 내편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상대와 상대편을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격하고 짓밟고 파괴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왜그럴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에 그런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라는 것을 안다면 내가 머리를 싸매고 열정을 바쳐서 해야하는 것은 함께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싸워서 이기는 길만 추구해 왔습니다. 너와 나 이웃과 이웃 또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세상이고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든 편갈라 싸우면서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저도 종교인입니다만 인류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약 60~70%가 종교전쟁이라고 합니다. 허울만 종교인 것이지요. 인간이 하는 일중에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전쟁인데 어떻게 종교의 이름을 전쟁을 벌이는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종교가 일으키는 전쟁이 말이됩니까 그런데 그것이 엄연히 역사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는데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이유는 첫 출발점은 바로 ‘나는 누구인지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이런 것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가 무관심하고 무지하고 또는 잘못할고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나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세상이기에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찾아가야 할 길은 함께 사는 길이라고 봅니다.

남북문제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세계관만 투철하다면 남북문제를 푸는 방식도 달리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얼마전 탈북자간첩조작사건 변호인과 당사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건 정말 생으로 간첩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는 북한을 함께 살아야 할 동포로 볼 것인가? 제거해야 할 악마로 볼 것인가? 동포로 본다면 간첩조작 같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제거해야 할 악마로 보기에 이런 간첩조작 사건 같은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이 문제를 안풀고는 남북문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동포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남북문제의 해법도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 함께 산다는 것

결국 우리가 인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에 부실하게, 투철하지 않게 천착하고 살았기 때문에 저는 세월호라 하는 비극이 벌어졌다고 봅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서로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고마워하고 배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꾸만 하나 되자고 하는데 하나가 되면 안됩니다.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여기 이 바닥과 내가 하나가 되면 걸을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따로 떨어져도 허공을 밟고 걸을 수는 없기에 역시 걸을 수 없습니다. 굳이 이야기 하다면 왼손과 오른손 같은 것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몸으로 보면 한몸인 것이고 그러면서도 분리된 다른 손이지 않습니까

하나이면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고 분리되어 있으면서 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이분법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관념적으로 불의는 싹 없애버리고 정의만 넘쳐나는 세상을 바랍니다. 그러나 과연 불의가 없고 정의만 존재하는 세상은 가능합니까? 그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손바닥과 손등 같은 것이고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정의와 불의가 동전의 양면이라 한다면 정의와 불의를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인생이란 뭔지 사실적으로 확인해 보면 어떻게 살 것이냐가 저절로 해답이 나옵니다.
 너 없는 나는 존제할 수 없게 때문에 너의 존재가치, 너에 의지해서, 나무에 의지해서, 태양에 의지해서, 이웃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부모에 의지해서 물에 의지해서 밥 의지해서 존재하고 상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나를 낳아서 질러주었기 때문이니 세상에 내 생명에 하느님, 부처님, 어버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있게끔 만든 그 누군가의 존재가치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보호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편안하고 따듯하고 인간다운 사람이 될 것이고 이런 대접을 받으면 역시 기분 좋을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게 함께 사는 길이라고 봅니다. 단순합니다. 복잡한 논문, 박사학위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삶이 복잡하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숨을 쉬기에 살고 숨은 저절로 쉬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는 숨쉬기를 세월호의 아이들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조건을 누군가가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공짜가 아닙니다. 저 하늘의 태양이 숨을 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곧 돌아올 엄동설한에 저 산위의 나무들이 제 할을 을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은 온 우주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자기 위치에서 제 역할을 정상적으로 해 주기 때문에 숨을 절로 쉴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내가 숨을 쉬면 사는 것입니다. 즉, 온 우주의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누군가의 신세로 우리가 살고 있다면 나도 그 도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삶은 엄중합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짜입니다. 가장 무서운 가치도 가장 위대한 가치도 공짜입니다. 가장 비싼 가치도 공짜입니다. 왜 그럴까요? 공로 숨을 못쉬면 인간은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꼭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삶을 소중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가능하게 새주는 이 세상에 대한 당연한 도리로서도 우리 삶을 잘 살아야합니다. 

저는 오히려 우리가 세월호라는 화두를 통해서 우리 삶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과 근원적 자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온 국민이 해야하는 일이지 대통령이, 장관이, 국회위원 몇 명이 해야하는 일인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세월호의 비극은 계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월호가 준 기적의 선물을 잘 파악하고 이 기적의 선물의 실제 삶으로 사회로 구현될 수 있게 하는데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마음들이 모아지면 희망래일이 고민하는 통일문제도 멋있게 바람직하게 푸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2014년 희망래일 대륙학교 녹취록입니다.
* [녹취 : 이종수]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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