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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14 시가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 글 <시인과 비행사>

이 글을 읽다 보면, "아! 시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딱 오는 듯하다.

시를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좋다!

이 글을 알게 해준 그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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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비행사


_산티아고 감보아


슬픈 이야기를 들려줄까 한다. 사실 지금 이 얘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다음 달로 미루거나 내년에나 풀어놓을 것인지, 아니면 아예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사람 중 하나인 나의 친구, 시인 이보 마카도(Ivo Machado)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최근에 구입한 금속제 모형 비행기를 눈앞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말했듯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포르투갈 아소르스 제도(諸島)에서 태어난 시인 이보 마카도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항공 관제사로 일했다는 점이다. 비행기가 하늘에 있는 길을 따라가도록 공항의 관제탑에 앉아 안내를 해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


이보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던 80년대 중반에, 아소르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산타 마리아의 공항에서 비행 관제사로 일했다.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이 제도는 유럽과 북미의 딱 중간지점이다.

어느 밤, 그가 공항 관제탑에 도착했을 때, 그의 상사는 “오늘은 자네가 단 한대의 비행기만 안내하면 되네.”라고 말했다.

이보는 깜짝 놀랐다. 평소대로라면 열두 대 가량의 비행기를 관제해야 했다. 그러자 상사가 설명했다.

“특별 케이스야. 어느 수집가가 제 2차 대전 당시의 영국 폭격기를 런던 경매장에서 구입한 모양이야. 영국 비행사가 그 폭격기를 플로리다까지 운항해서 수집가에게 배달하는 임무를 맡았지. 그 비행사가 여기 기착했다가 캐나다 방향으로 가는 중인데 말이야, 폭격기의 비행성능이 신통치 못한데다가 폭풍까지 만났지 뭔가. 지그재그로 비행을 하다 보니 연료가 바닥이 나서 캐나다까지 갈 수도 없고 여기로 회항할 수도 없다고 연락이 왔네. 바다로 처박힐 판이지.”

상사는 쓰고 있던 헤드폰을 그에게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친구 좀 진정시키게. 극도로 불안한 상태야. 캐나다 구조대가 출발했고 헬리콥터들이 추락 예상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고 설명하게.”


이보는 헤드폰을 착용하고 그 영국 비행사와 대화를 시작했다. 비행사의 목소리는 극심히 떨고 있었다. 그가 우선 알고 싶은 것은 바닷물의 수온이 어느 정도인지, 혹시 상어 떼가 나타나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이보는 상어 떼 따위는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런 뒤 그들은 사적인 대화로 들어갔다. 사실 관제탑과 비행사 사이의 대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비행사는 이보의 삶에 대해, 이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보의 느낌에 대해 물었다. 이보가 자신이 시인이라고 말하자, 그 영국인은 기억하는 시가 있으면 낭송을 해달라고 청했다. 다행히도 내 친구는 월트 휘트먼, 코울리지, 에밀리 디킨슨 같은 시인들의 시를 몇 편 외우고 있었다. 이보는 낭송을 해주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소네트라든가 우주의 격렬한 분노와 맞서 싸우는 ‘늙은 선원의 노래’에 나오는 몇 구절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그러다 보니 그런대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정도 평정심을 회복한 비행사는 이보 자신의 시를 몇 편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보는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시 몇 편을 그 자리에서 번역하여 이 영국인을 위해서 낭송했다.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서, 고물 폭격기에서 외롭게 조종간을 붙잡은 비행사를 위해서, 캄캄한 바다 위에서 격렬한 폭풍과 싸우는 그를 위해서, 그리고 극도로 날카롭고 끔찍할 정도로 고독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위해서.

“당신 시에는 뭔가 깊은 슬픔이 있고 또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각성 같은 게 있군요,”

낭송을 듣고 나서 비행사는 감상을 조용히 전했다.

두 사람은 인생과 꿈에 대해, 깨지기 쉬운 것들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오고 말았다. 연료 게이지의 바늘이 붉은 눈금 아래로 떨어지자 폭격기는 바다로 추락했다.


이 일이 일어난 뒤, 관제탑의 책임자는 이보에게 집으로 퇴근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보가 이런 일을 겪고 당일 다른 비행기를 안내하는 것은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 이보는 그 사건의 결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구조대는 아무런 손상 없이 바다에 떠 있는 비행기를 발견했지만, 비행사는 사망하고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비행기가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의 충격으로 기내 구조물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그의 목을 강타했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군.” 이보가 내게 설명했다.

“그 비행사 때문에 내가 계속 시를 쓸 수 있는 것 같아.”


몇 달이 지난 뒤, 국제항공운송협회가 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보는 배심원단 앞에서 자신과 비행사가 나눴던 대화의 녹음 내용을 듣게 되었다. 배심원단은 그에게 수고했다는 감사의 말을 건넸다. 항공 역사상 관제탑의 주파수를 시로 가득 채웠던 건 그때가 유일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 사람 목소리를 꿈꾸곤 하네.”라는 이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마음으로 시를 써야 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쓰는 모든 말들이 한밤중에, 격렬한 폭풍에 맞서서, 사투를 벌이는 어느 외로운 비행사를 위한 것처럼.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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