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독을 먹이는 기업, 당신이 절대 모르는 이유
[미완의 민주주의-그대의 목소리를 찾아라] 반다나 시바


그의 손이 엄마의 밥상을 지켜왔다는 것을 알지 못 했다. 그의 마음이 없었다면 엄마의 정성은 애당초 갈 길을 잃는다는 것을. 내 아이의 몸을 지켜낼 수도 없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 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농민이 물대포를 맞았다. 죽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세상은 소란스러워졌다. 폭력시위, 물대포, 사망진단서, 의사의 양심, 외압... 참사를 혼동으로 몰아가는 단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쌀값은 개 사룟값에도 못 미치고, 토종의 씨앗은 뿌리내릴 땅을 찾지 못하고, 거대 자본에 의해 휘둘리는 세상의 밥상은 GMO와 항생제로 물들고 있다는 것. 오늘도 농부들은 황급히 거둬들여야 할 들녘의 여문 곡식을 뒤로하고 아스팔트에서 한뎃잠을 잔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견고해져 오던 지난 30여 년 동안 거대 자본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세계의 농업과 환경을 지키고자 인도 출신의 물리학자 반다나 시바는 반세계화 저항에 앞장서 왔다. 

이 펀딩의 마지막 편에서는 그녀의 대담을 복기하며 주로 지구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한국 농민의 뜨거운 저항을 증언하는 그녀의 말에서 그만 옴짝 못할 울컥거림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농부의 정성이 가슴으로 사무쳐왔다.

▲ 반다나 시바 ⓒ 안희경


반다나 시바는 1993년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에 맞서 전 세계 농민의 저항을 조직한 이야기를 했다. 쌀개방에 맞서 함께 한 한국 농부에 대한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러나 있던 나의 기억도 선명해졌다. 당시 트랙터와 경운기가 고속도로를 메웠고, 전국의 농민들이 여의도로 몰려들었다. WTO(세계무역기구)로 저항 상대는 바뀌었지만, 그 뒷배로 버티고 있는 거대 자본은 변하지 않았고, 농부들은 기나긴 저항을 이어갔다. 

반다나는 십년 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벌어진 그 일도 토로했다. 한국 농부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세상을 향해 외친 경고, "FTA(자유무역협정)가 농민을 죽이고 있다". 반다나는 묻는다. "그래서, 지금 소비자인 우리네 밥상은 안전한가?"라고. 

농민이 스러져간 거기, 그 처절한 저항의 역사 속에 백남기 어른도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산골 마을을 찾아 토종 씨앗을 얻고 작물을 키워온 일생과 아스팔트 농사를 지어온 농심은 한 곳을 향한다. 농부의 안전한 삶 그리고 그 농부의 손에 기대어 먹는 국민의 안전한 밥상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국가는 같은 길을 걸었다. 미국의 농부도 한국의 농부도 브라질의 농부도 모두 도시로 몰려들었다. 산업이 농부들을 도시로 부르기도 했고, 땅에서 쫓겨나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그 결과 세계 인구 70%가 도시에 산다. 도시로 몰려온 과거의 농부들은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손으로 땅을 일궈 먹고 살던 능력, 모든 야생 동물들이 다 갖춘 자급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살아갈 가능성은 오직 돈을 버는 데 있기에 인간 자체가 생산을 위한 단가 경쟁에 돌입한다. 

농촌의 삶도 변하였다. 농업이 산업화되고, 식량이 투기자본에 잠식되면서 전 세계 농토는 시장 논리로 재편되었다. UN 식량농업기구(FAO)의 발표에 의하면 오늘날의 농업 생산량이라면 성인 기준 하루 2200칼로리로 120억 인구가 먹고 살 수 있다 한다. 

두 배 가까이 인구가 늘어난다 해도 배고픈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될 양이다. 하지만 지금 5초 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가 배곯아 죽고 있다. 매일 5만7천 명이 죽는다. 식량이 제품이 됐고, 돈이 되었기에 벌어지는 살인이다.

기아 걱정 없는 우리네 밥상은 어떨까? 주요 식품 회사들이 GMO 콩을 수입한다. 된장 간장은 유전자 조작 씨앗이 잠식했다. 밭 한 뙈기 꾸릴 줄 모르는 도시 노동자들, 한 평의 땅이 있어도 시간이 없는 타임푸어 워킹푸어가 마주할 밥상은 점점 더 먹지 못할 것으로 차려지고 있다.

농업이 산업이 된 배경에는 세계대전이 있는데, 전쟁 기기를 만들던 회사들은 전쟁이 끝나고 팔 곳이 없자 농기계를 만들었다. 화약을 만들던 회사는 질소를 비료로 전환시켰다. 독가스를 만들던 기업을 대안을 찾기가 훨씬 쉬웠다. 제초제, 살충제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회사들이 세계의 종자를 끌어모아 유전자 변형을 하여 특허를 내고 불임 종자를 만들어 제초제와 함께 팔고 있다. 세계의 농민과 농토가 그들의 이윤 속으로 빨려가도록 국가를 주무른다. 이제 식량은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 할수록 몸으로 더 많은 독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식량 독재구조이다. 지구 전체를 시들게 하는 죽음의 순환인데, 자본은 이를 극렬히 외면하고 있다. 반다나 시바는 지구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살리는 경제", "살아나는 민주주의", "살아있는 의식"을 일으키자 한다. 죽음의 문화가 아닌 생명의 문화 속에 살길이 있기에.

반다나 시바와의 대담은 2012년 10월 31일 샌프란시스코, 세계화국제포럼 본부에서 가졌다.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의 지적이 더욱 구체적 실상이 되어버린 오늘이다.


"지금 당신이 뭘 먹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는 기업이 매일 백만불을 쓰며 전하는 메시지가 작동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당신한테 독을 먹이지만 당신은 그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 이는 음식 독재입니다. 식량 독재죠. 음식 독재는 정치적 독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요. 저는 독재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를 지지합니다.

식품은 생태적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입니다. 지구의 자원에 대해 그 어떤 (인간의) 활동보다 훨씬 많은 폐해가 산업화된 농업에서부터 식품산업 구조 전반에까지 벌어지고 있어요. 지구의 75% 토양이 약화됐고, 75% 수자원이 파괴되었으며, 75% 생물종이 멸종했습니다. 기후 위기는 40% 증가했고요. 제일 먼저 우리는 소농과 친환경 농업을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시대의 엄청난 환경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바로 먹을 권리입니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권리를 얻지 못하거든요. 십억의 인구가 먹을 권리를 빼았겼습니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 대부분이 음식이 아니라 상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에요.

나는 알아요. 몇 년 전 일이죠. 한국 농민들과 한국인은 저항했습니다. 바로 호르몬 항생제를 주사한 소고기 수입을 막자고요. 한국인은 외쳤죠. "소고기 수입 반대! 우리에겐 우리의 좋은 소고기가 있다." (FTA)이해 당사자들은 부정했어요. 

저는 자유무역으로 벌어진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92년, 93년에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에 반대하는 전지구적인 저항을 조직했습니다. 50만 인도인이 한국 농민을 포함해 전세계 농민들과 함께 저항했습니다. (2003년) 칸쿤에서는 한국 농민이 목숨을 끊으며 외쳤죠. "자유무역이 농부를 죽이고 있다!"

그동안 27만 인도 농부들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농부들은 점점 힘들어졌구요. 그럼 소비자는요? 우리는 좀 나아졌나요? 아니죠. 우린 이제 독을 먹고 사는 처지가 됐잖아요. 온갖 살충제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 더 나쁜 식품을 먹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농민들만 싸워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됐어요. 소비자들만도 힘든 싸움입니다. 청년들의 문제도 그들만으론 안 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우리의 권리를 지키고 미래의 자유를 지켜내야 합니다.

모든 문제에는 씨앗과 뿌리가 있죠. 모든 해법에도 씨앗이 있구요. 씨앗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의미로는 삶을 주죠. 또, 어떤 일의 바탕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에는 근본 원인들이 있어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시작할 수 있는 근원적인 출발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씨앗 해방 캠페인'을 합니다. 왜냐하면, 거대 기업이 종자를 소유하고, 유전자를 조작해서, 특허로 묶고, 불임종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들은 엄청난 이윤을 만들고, 그들만을 위한 제국을 창조하려고 지구의 인류와 모든 생명을 완전히 통제하려 합니다. 하지만 씨앗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되찾고, 자유를 되찾을 겁니다. 이는 바로 25년 전에 제가 '나브다냐'를 시작한 이유지요. 올해부터 지구적인 시민 운동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자를 보존하고, 먹거리를 키워요. 유기농사를 짓습니다. 공정무역을 이뤄왔죠. 사람들이 와서 맛보고는 이런 말을 해요. 어릴 적 먹던 그 맛이라고.

제 책 중에 <지구민주주의>라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영감을 얻은 책이죠. 지구의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흙은 식물과 연결되어 있죠. 식물은 우리의 건강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농사 짓느냐에 따라 기후변화도 좌우됩니다. 기후변화는 우리가 식량을 갖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고요. 그러니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거죠.

제가 지구 민주주의를 말할 때, 이는 모든 생명의 민주주의를 뜻하는 겁니다. 지구는 하나의 가족이니까요. 또한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기도 해요. 우리 삶에 뿌리내린 민주주의죠. 돈, 자본, 권력에 뿌리내린 것 말고요. 

미국의 선거를 봐요, 아마 한국 선거도 그럴지 몰라요. 누가 더 돈을 많이 가졌냐에 따라 달라지는 선거잖아요. 민주주의란 국민이 국민을 위해 국민을 바탕으로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기업에 의해 그들을 위하고 그들 손으로 더 많은 돈을 벌도록 지구의 자원을 훔치게 하고 있습니다. 지구 민주주의는 바로 우리 모두의 연결이에요.

여성이 권한을 갖고, 배고픔을 없애고, 이 모든 것이 서로 안에 연결되어 생명의 피륙으로 짜여지는 것이죠. 이를 위한 하나의 핵심이 '살리는 경제'입니다. 지금까지는 죽이는 경제였어요. (두 번째 핵심,) '살아나는 민주주의', 지금까지 텅빈 민주주의가 됐죠. 우리를 대변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오히려 우리와 단절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 '살아있는 의식'을 일으켜야 해요. 죽음의 문화가 아닌 생명의 문화 속에 있어야 합니다."

- 지금 당장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씨앗을 지키는 겁니다!" 

▲ 반다나 시바 ⓒ 안희경


촘스키 선생을 비롯해 모든 석학에게 늘 마지막으로 건넨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때 보았던 그들의 얼굴을 기운 잃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석학들의 표정은 '그걸 왜 나한테 묻나요? 당신이 답인데...'라고 반문하는 듯했다. 그리고 직접 말했다. 

"당신들이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창을 열어 밖을 바라보려고, 더 멀리 보려고 안경알만 닦아왔던 내게 석학들이 꺼내준 것은 거울이었다. 내 안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결국 답은 내 안에 있고, 세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답도 우리가 품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미완의 민주주의-그대의 목소리를 찾아라' 이 기획이 우리의 가치를 확인해보는 여정이 되길 바란다. 단 한 명이라도 그 석학의 지혜에 화답한다면, 세상은 한층 나아지리라 믿기에. 한 생명이 밝아지면, 세상은 그만큼 희망을 얻기 때문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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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전환연구소> 인터뷰 글을 퍼왔다.

곰곰이 읽어볼 만하다 싶고, 녹색당원들이 이런 일을 벌여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녹색이 일자리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인드라망에서도 고민해 볼 만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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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농촌으로 갑시다!"



- 인터뷰어 : 박이상(녹색전환연구소 편집위원)

- 인터뷰이 : 전제언(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수확의 계절 가을이 왔다각 지역에서 추수가 한창이다유독 폭염이 심했던 올해는 일조량의 증가로 쌀농사가 대풍이다하지만 풍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사정은 더욱 열악해졌다생산량이 대폭 증가하자 이는 쌀값 하락으로 이어졌다쌀 80kg 한 가마니 가격이 30년 전 값으로 뚝 떨어졌다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급격한 가격 변동은 그 대상의 존재 기반을 무너트릴 수도 있는 위험한 요소 중 하나다농산물 가격을 형성하는 곳은 유통시장이지만 한 국가의 식량주권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농업이다단순히 자본논리에 의해서만 농업 경제력이 좌우되는 현 상황으로는 국민들의 식량주권을 지키기 어렵다.

 

이런 현실 속에서 농업 유통에 대한 새로운 꿈을 안고 사업을 시작한 이들이 있다. ‘생생농업유통은 농촌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도시로 판매하는 유통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20대 청년들이 만들어서 청년기업으로 유명하기도 한 이곳은 최근엔 소녀방앗간이라고 하는 식당을 창업하고 전국으로 매장을 넓혀가며 사업을 확장 중이다지난 10월 1일 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전제언씨를 만나 그들의 사업과 농촌에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1.jpg생생농업유통 부사장 전제언

 


- ‘생생농업유통은 어떤 곳인가?

 

우리는 농산물 유통업체다지역의 농산물을 사서 도시로 팔고 있다. ‘생생농업유통이란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한 것은 2012년부터지만 이 이름을 달기 전에도 이미 농산물 유통사업을 하고 있었다사장인 김가영 대표는 10년 전부터 농산물유통을 시작해왔다나는 여기서 일한지 5년 정도 되었고 가장 오래된 직원이다.

 

농산물 유통이 흔한 일은 아닌데 원래 농사를 짓거나 농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건가?

 

그렇진 않다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 출신이었고 농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에서 출발했다.농사의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배워가는 중이다비록 농사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기존의 마을 주민들과 다른 젊은 사람의 입장에서 느껴지는 감수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산나물고춧가루양파마늘... 모든 농산물에는 농산물을 키운 어르신들의 삶이 담겨 있고 그 지역의 문화가 녹아 있다이런 농산물을 유통하는 일은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유통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그런 감수성이 우리 사업의 방향을 결정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농산물을 수확하는 현장에 가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 있다그런 지역의 고유한 느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비자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다면 농산물의 가치도 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그래서 단순히 농산물만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농산물을 통해 지역의 가치를 도시로 이어주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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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받은 인상을 이미지와 문구로 표현한 천막

 

- 20살부터 농산물 유통업을 시작한 김가영 대표의 이야기는 청년 사업의 성공담으로 언론을 통해 많이 소개가 되었다. ‘생생농업유통도 어느덧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것 같다현재의 회사 규모는 어떤지 궁금하다.

 

우리가 유통하는 농산물 규모는 해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대략적으로 연간 쌀은 10~15된장은 3~4산나물은 1톤 정도 유통한다. ‘소녀방앗간이 생긴 이후로는 여기 식재료를 주로 납품한다. ‘소녀방앗간이 한식당이다 보니 한식재료가 다양하게 필요하고 우리가 대는 품목도 다양하다품목 관계없이 다 하면 연간 50톤 정도 되는 것 같다.

 

직원은 총 3명이다김가영 대표와 나와 또 다른 직원이 한명 더 있다함께 하던 남자직원이 한명 더 있었는데 지금은 업무 상 소녀방앗간’ 소속으로 옮겼다. ‘소녀방앗간’ 직원들은 30여명이다이밖에 우리에게 납품하거나 같이 작업하는 어르신은 6~70명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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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 함께 일했던 김가영전제언현동환

 


- ‘소녀방앗간과 생생농업유통은 이름도 다르고 대표도 달라서 처음에는 별개의 회사인 줄 알았다하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두 회사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 같다.

 

두 개 회사가 각각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사업은 같이 굴러간다고 보면 된다기본적으로 소녀방앗간에 들어가는 대다수의 식재료를 생생농업유통이 납품하고 직원들도 함께 유기적으로 일하고 있다나도 서울에 올라오면 소녀방앗간’ 건물의 직원 숙소를 사용한다서로 일하는 지역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다는 정도가 차이 날뿐 같은 직원들이라고 생각한다. ‘생생농업유통의 김가영 대표는 소녀방앗간’ 이사로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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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방앗간 1호점 오프닝 전시회 포스터

 

그럼 생생농업유통’ 외에 소녀방앗간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김가영 대표가 처음 농산물 유통업을 시작했을 때 취급했던 품목은 상추였다상회음식점 등 여러 판매처에 상추를 대기 시작했는데 계속 변수가 생기는 거다농산물 유통은 온전히 우리 판단력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수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날씨서부터거래처가 도산하거나우리와 관계가 틀어져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는다거나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한다그러다보니 농가와 계약한 주문량을 지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농가와의 약속을 깨지 않고 우리 사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 소비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부분의 농가는 고춧가루마늘대파 등 우리가 한식을 만들어 먹을 때 쓰는 재료들을 재배한다농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농산물을 이용한 사업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한식당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우리가 주로 거래하는 생산지에서 많이 나는 농산물을 소녀방앗간의 메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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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 나물하는 하루 일상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전달한 전시회

 


단순히 농산물 유통에 그치지 않고 한식당 사업으로 확장한 것은 도전적이고 색다른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그럼 기존의 농산물유통업체와 생생농업유통의 가장 큰 차이점이 궁금하다.

 

우리가 기존 방식을 잘 모른다는 거모르다 보니 생산자나 소비자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게 우리 사업에 힌트가 되었다물론 기존의 업체를 통해 배울 것도 많다지금도 계속 배우는 중이다.

 

보통 유통업은 중간에서 이윤만 많이 남기고 착취하고 농민들과 소비자를 단절시키는 역할이라고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중간 역할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농민들은 농산물을 팔면 그 시점부터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하지만 소비자에게 가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그 중간 상황을 떠 앉는 건 유통업자의 몫이다.

 

예를 들어배추 10톤을 떼 온다 치자소비자는 이걸 한 번에 다 살 수 없다. 1톤씩 매월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면 10개월 간 다 소진할 수 있다이럴 때 중간자 역할이 분명 있다이런 필요에 의한 역할이 유통업에게 있다는 걸 알지 못하면중간에서 폭리만 취하는 나쁜 놈이라 생각하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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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방앗간 입구마다 소개된 나물과 할머니들의 이야기

 

우리가 기존 업체와 또 다른 점은 서로의 상황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거다. ‘소녀방앗간에서는 산나물 재배하는 어르신고춧가루 빻는 어르신간장 담그는 어르신... 농산물을 만든 어르신들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한다사실 식당에서 농작물 작황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식당에 납품할 농산물 수량과 품질만 잘 맞추면 되는 거지이건 식당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서빙 잘하고 요리만 잘하면 되는 거지 농산물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지은 농산물을 먹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농사지을 때도 더 정성을 쏟게 된다.할머니할아버지들이 손주들 주려고 재배한 건 얼마나 알찬가그리고 이 농산물이 어떻게 생산됐으며 그 작은 열매 하나에 수십년의 노하우와 수고가 들어갔는지 알게 된다면요리할 때도 더 공들여 요리를 하게 된다이렇게 농산물을 따라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게 되는 일이 농촌과 도시가 연결되는 지점일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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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어르신들과의 나물수확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농산물 유통을 단순히 자본의 이동이 아닌 문화와 가치의 이동으로 본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과도 비슷해 보인다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농민과 만나는 방식은 아마 생협과 비슷할 거다생협도 농산물에 대해서 농민들과 계약 재배를 한다고 알고 있다우리도 사전에 가격을 책정하고 계약 재배를 한다하지만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으로 크기 위해서는 규모도 훨씬 커져야 하고 사람도 더 많이 함께 해야 하는 등 제약사항이 많은 것 같다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중이다.

 

개인적인 삶의 이력도 궁금하다농업에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나?

 

전혀 아니었다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정작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문제가 더 크다고 느끼고 있었다내 안의 많은 불만들이 다 모난 성격 때문인 건가 싶어서그러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나의 그런 불만들이 내 개인의 탓이 아닌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가부장제여성억압나이억압 등 여러 가지 억압적인 문제들이 바로 사회적인 문제라는 걸 알았으니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권력을 가져서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그런 큰 야망이 있는 건 아니었고그저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사회생활도 그런 기대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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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 도전한 무농약 무퇴비 무비닐 농사 중볏짚으로 두둑을 멀칭

 

첫 근무지는 희망청이란 곳이었다당시엔 청년이 사회적 화두가 되어 많은 얘기들이 나오던 시점이었다하지만 정작 청년 당사자들이 뭐라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별로 없어서 그들 스스로 이야기하고 액션을 취하는 게 필요하다 싶어 만들어진 곳이어서 청년 문화사업 관련된 일을 주로 했었다.

 

그곳에서 마포는 대학처럼 마을과 지역을 바탕으로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와 주변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그런데 태어난 이후 줄곧 도시에서 살았음에도 도시가 내 동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다출퇴근 시간의 지옥철을 벗어나 내가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그래서 희망청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럼 농산물 유통을 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생생농업유통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처음엔 전주의 사회적기업 이음에 들어갔다전주는 소도시여서 차 타고 10분 정도 나가면 다 논밭일 정도로 자연과 가깝고 문화적 인프라가 많아서 살기 좋았다그곳에서 하는 일이 농촌에서 하는 문화 사업과 마을 사업이어서 인근 지역을 차로 많이 돌아다녔다에어컨도 안 나오는 달달거리는 트럭을 타고 산이며 하늘이며 구름이며 음미하면서 달려가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내가 그동안 본 것 중에 가장 큰 하늘을 거기서 봤다그렇게 전주 생활을 즐기다가 김가영 대표가 제안해서 함께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김가영 대표와는 어떻게 같이 사업을 하게 되었나.

 

대학 때 같은 과 친구였다그땐 별로 안 친했는데 내가 전주에 내려와 농촌에서 일하면서 친해졌다김대표는 대학시절에도 지리산 농산물 유통업을 하느라 바빴다나는 대학 때 탈춤 동아리를 열심히 했는데한참 탈춤 연습하다가 수업에 늦어서 교실 맨 뒤에 앉아 숨 돌리고 있으면 누가 조용히 들어와 내 옆에 앉는 거다그래서 쳐다보면 김대표였다그러다 곧 전화가 오면 다시 조용히 사라지고... 그런 모습을 보며 쟤는 뭐지 했던 기억이 난다아마 김대표도 당시엔 나를 보며 지하실에서 탈춤이나 추는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음에서 했던 일이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거였고 그러다 보니 농촌 구석구석을 많이 돌아다녔다탈춤 출 때는 탈춤 추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이듯이농촌에 사니까 농사 짓는 사람들이 제일 멋있어 보였다그래서 농사도 한번 지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김대표가 전북 완주에서 고추농사를 지어보자고 제안해 왔다돌부터 골라내야 하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주변에서는 어떻게 농사 짓는 지 잘 보고 눈치껏 따라하면서 고추농사를 지었다농사짓는 과정 자체가 다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어서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움이 더 컸다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김대표와 함께 유통업에 뛰어들었다시작은 고춧가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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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고추농가와 계약 재배한 고추를 수집하는 날, 5톤 트럭과 트렉터 동원

 

문화기획 일을 하다가 농업유통으로 바꾼 셈이다청송에 있을 때 산나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지의 메리트라는 잡지도 만들었다고 들었다지역의 문화생산에 계속 참여하고 있었던 셈인데 문화기획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앞으로도 유통업을 계속 할 생각인지 궁금하다.

 

사실 지금 딱 유통업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우리가 지금 하는 유통업은 문화기획이 함께 들어가 있다고 본다물론 농가와 만나서 가격 흥정하고 물건 받아와서 납품하고기본적으로 하는 유통에 필요한 업무들이 있다하지만 이 외에도 농산물로 다양한 문화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작년에는 정부 지원금으로 청송 지역 단체들과 협력하여 청송창조지역사업단을 꾸리고 다양한 지역 문화 사업도 벌였다. ‘오지의 메리트는 그 일부였다.

 

예를 들어 소녀방앗간에 산나물을 따는 어르신들의 하루를 사진과 문구로 전시를 한 적 있다유통업자로서 일하면서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고그 이야기와 가치를 전하기 위한 문화적 노력의 결과가 전시로 나온 거였다.

 

우리가 유통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 사업방식으로는 부족했다그래서 도시에서 살면서 길러진 감성과 습성을 유통업에 접목해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냈다지난번엔 농촌에서 간장 담그는 어르신쌀 빻는 어르신 등 우리와 같이 작업하는 어르신들을 모셔서 소녀방앗간’ 매장에 가서 밥을 먹었다그분들도 내가 따온 나물이내가 담근 간장이이렇게 밥과 찬으로 나오는 걸 처음 보신 거다서울에서 우리 농산물로 이렇게 식당을 하는 구나 알게 되니까 관계가 더 두터워지게 된다.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다어르신들을 얘기로만 듣다가 직접 보게 되면서 자신이 요리하는 식재료에 더 믿음이 가게 된다그래서 소녀방앗간’ 메뉴판을 보면 각 식재료를 만든 어르신 이름이 들어가 있다지금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농산물을 매개로 도시와 농촌을 잇는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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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공연과 함께 한 가을청송창조지역사업단에서 함께 만들었던 청송별밤축제

 

도시에서 지역으로문화기획자에서 유통업자로그리고 다시 지역에서 도시로유통업자에서 문화기획자로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삶의 이력이 흥미롭다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된다추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리가 농담 반진심 반으로 뉴욕에 가자는 말을 하고 있다. ‘소녀방앗간’ 매장을 뉴욕에 오픈하고 싶은 꿈이 있다최근에 제주도에도 매장이 하나 생겼는데 제주도만 해도 우리에게는 외국이나 다름없는 새로운 도시다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한다우리의 또 다른 도전이다.

 

만약 뉴욕에 매장을 연다고 하면뉴욕까지 한국 농산물을 이송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 소비량과 탄소 배출량이 증가하게 된다이런 환경적인 측면으로 뉴욕 진출을 고려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 지역에서 나는 음식물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만 먹는다면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음식물을 못 먹고 살아야 되는 건가 질문해 볼 수도 있다이 문제는 주말농장과도 비슷한데주말농장도 자연 속에서 생태적인 삶을 얘기하지만 거기까지 가려고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탄소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농장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농장생활을 직접 접했을 때 농작물에 대한 이해도 생기고 파급력도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도 청송에서 뉴욕으로 식재료를 이동했을 때 드는 비용과 오염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그 음식을 먹으면서 청송과 한국 농촌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파생되는 효과와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뉴요커가 우리 음식을 먹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와 가까운 지역에서 생태적인 활동을 하고 싶은 꿈을 키울 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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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창조지역사업단에서 폐교를 청년 지역정착 실험공간으로 꾸밈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처럼 농산물 유통을 토대로 도시와 농촌이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전환이 만들어지길 꿈꿔본다끝으로 녹색전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녹색전환은 환경을 생각하는 삶 같다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농촌생활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환경을 생활의 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유럽연합에서는 농사 짓는 사람을 단순히 식량 생산으로 의미화 하는 게 아니라 이 지구의 녹지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자라고 규명하기도 한다그래서 이들에 대한 지원사업도 보면 이들이 농촌에 살면서 논과 밭을 일구고 나무 심고 환경숲을 가꿔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원한다는 개념이 들어가 있다그래서 농업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녹색전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농촌에 살면서 삶의 전환을 경험했다온종일 머리로만 씨름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도시생활에서직접 몸을 움직여 땅을 갈고 풀을 베고 농작물을 수확하면서 머리도 더 상쾌해지고 활력이 솟았다삶 자체가 건강해지는 것을 느꼈다그래서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같이 농촌으로 갑시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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