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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7.11 [버트런드 러셀_런던통신]두 번의 크리스마스

중년에 관한 글

글쎄 아직은 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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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at Sea


내 생애 두 번째로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첫번째는 35년 전이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을 비교해보면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다.


35년 전에 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이는 없었으며 매우 행복했다. 그리고 성공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게 가족이란 자유를 구속하는 외부의 권력으로 다가왔고 세상은 개인적인 모험의 대상일 뿐이었다. 전통이나 윗사람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나만의 생각을 하고 싶었고, 나만의 친구를 사귀고 싶었으며, 나만의 보금자리를 찾고 싶었다. 버팀목에 기대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가 넘치는 활력 덕분이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때 나는 바다에서 맞는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됐고, 승무원들이 최대한 축제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도 흥겨웠다. 배는 좌우로 엄청나게 흔들렸는데,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납작한 선박용 트렁크들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객실 이쪽저쪽으로 미끄러졌다. 그 소음이 커질수록 내 웃음소리도 커졌다. 모든 게 끝내줬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타협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원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면 누군가의 애정이, 차가운 세상의 한기를 몰아내 줄 사람의 온기가 필요해진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대개 그렇듯 단순히 개인적인 두려움, 즉 죽음이나 노화나 빈곤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세속적인 갖가지 불행 따위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좀 더 형이상학적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살다 보면 겪게 마련인 중대한 재난들, 이를테면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거나 평범한 인간 본성에 잠재된 잔인성을 발견하는 일 등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영혼에 스며드는 두려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대서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뒤로 35년 동안 이런 나쁜 일들을 경험하며, 인생에 대해 내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태도마저 바뀌었다. 도덕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도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의 기분으로 즐기지는 못할 거다. 나는 자식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고, 가족과 더불어 따뜻한 난롯가에 앉고 싶고, 역사의 연속성과 위대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싶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중년들이 크리스마스에 즐기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기쁨이다. 그 점에서는 철학자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평범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음울한 고독을 달래는 데 있어 그런 기쁨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즐거운 모험이었던 바다에서의 크리스마스가 지금은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대중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으면서 홀로 서기를 택한 사람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감미로운 즐거움이 모두 그러하듯 가정에서 얻는 기쁨도 의지를 약화시키고 용기를 훼손할 수 있다. 가정에서 따뜻하게 보내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수평선이 선사하는 해방감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이런 아름다움은 어리석고 사악한 인간들의 손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비틀거리는 중년의 이상주의에 힘을 불어넣는다.(1932. 1. 13.)


Posted by 익은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