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된 산업화 시대 이후를 홀로세를 넘어 인류세라 이름 붙이기도 한다. 

인간이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지구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지구를 살릴 구세주이기도 한 인류. 

희망은 있을까? 기대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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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왈, 2050년을 위해 인류는 뭘 준비해야 하나


1부: 오직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 유효하다

인류는 전례없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과거의 이론이 붕괴하고 있으며 어떤 새로운 이론도 이를 대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례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2050년에 겨우 30대 초반일 겁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2100년, 곧 22세기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갈 겁니다. 오늘날 태어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이들이 2050년 또는 22세기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시대에도 직장을 얻고 세상을 이해하고 인생의 미로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기술을 가져야 할까요?

안타깝게도 오늘날 누구도 2100년, 아니 2050년의 세상 조차도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누구도 이 질문의 답을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인류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했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신체와 뇌, 마음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오늘날, 과거에는 고정되었고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모든 사실들을 이제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인 1018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미래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기본적인 요소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1018년의 중국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1050년 쯤 송 제국이 멸망하고 거란족이 침입하며, 또 역병이 돌아 수백 만 명이 죽는 것을 겪게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1050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부와 베짜는 직공으로 일하고, 정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와 관료를 가질 것이며, 가부장제가 유지될 것이며, 평균수명은 여전히 40세 언저리일 것이고, 인간의 육체적 특징 또한 전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1018년, 가난한 이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쌀을 파종하고 비단을 짜야할 것인지를 가르쳤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아들에게는 공자의 가르침과 서예, 말을 타고 싸우는 법을 가르쳤고, 딸에게는 검소하고 성실한 부인이 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1050년에도 이런 기술이 유용하리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중국만이 아니라 다른 세계 역시 2050년에 어떤 특징을 가질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으로 돈을 벌지, 군대와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마 지금보더 훨씬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며, 생명공학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을 통해 인간의 육체 또한 과거와는 비할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대부분의 기술이 2050년에는 쓸모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희귀한 것이었고 부족한 정보 마저도 검열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없었기에, 이는 매우 합리적인 교육방법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1800년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바깥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신문, 도서관 등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어떤 도구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글을 알고 책을 접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소설이나 종교 서적을 제외한 책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페인 제국은 모든 국내 인쇄물을 철저하게 통제했고, 외국 서적 또한 검열을 통과한 것들만 드물게 허용했습니다. 당시의 러시아, 인도, 터키, 중국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근대적 학교 제도가 등장했을 때, 모든 아이들을 읽고 쓸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지리학, 역사, 생물학의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곧 인류의 거대한 진보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를 막으려 하는 이도 없습니다. 그 대신 어떤 이들은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며, 우리의 관심을 불필요한 것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당신이 지금 멕시코의 한 마을에 살며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위키피디아를 읽고, TED 강연을 보며,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정부도 그들이 원하지 않는 정보를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이제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것이 극도로 쉬워졌습니다. 전세계의 사람들이 클릭 한 번으로 시리아 알레포에 떨어진 폭격 소식과 북극의 빙산이 녹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또한 수많은 반대되는 주장들이 있어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알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역시 수많은 다른 주제들 때문에 사람들은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으며, 또한 정치와 과학이 너무 어렵게 보일 때, 고양이 비디오나 연예인 소식, 포르노 영상은 더욱 유혹적이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장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이 더 많은 정보일 것입니다. 이미 학생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그 정보가 합리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며, 무엇보다도 수많은 작은 정보를 모아 세상에 대한 폭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이는 서구의 진보적 교육이 수백년 동안 추구해온 목표이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서구 학교에서는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정보를 직접 먹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진보적인 학교로 하여금 거대담론에 대한 특별한 공포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많은 지식과 약간의 자유를 줄 경우 학생들이 알아서 세상을 이해하고, 설사 그들 세대가 모든 지식을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이를 해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라 가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일이십 년 내에 우리가 내릴 결정은 인류의 미래 자체를 결정할 것이며, 우리는 오직 우리가 지금 가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 세대가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면, 인류의 운명 또한 그저 던져진 주사위에 의존하게 될 뿐입니다.

2부: 변화는 시작되었다

학교는 너무 많은 정보를 주입하는 것 외에도 미분방정식 풀이나 C++ 프로그래밍, 시험관의 원소 식별과 중국어 대화 같은 특정한 기술을 가르치는데 너무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2050년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기술이 가치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C++ 프로그래밍이나 중국어 대화에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지만, 막상 2050년이 되었을 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프로그래밍을 더 잘하며, 새로운 구글 번역 앱이 만다린, 칸토니즈, 하카를 거의 불편함 없이 통역해줄지 모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 기술을 가르쳐야 할까요?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가 다음의 “네 가지 C”, 곧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소통(communication), 협력(collaboration), 창의력(creativity)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학교는 구체적인 기술 교육을 줄이고 보다 범용적인 삶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신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2050년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품을 발명하는 능력 못지 않게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재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속도와 함께 경제적 변화 외에 “인간의 조건” 또한 변화하고 있습니다. 1848년, 공산당 선언에는 “모든 확실한 것들이 공기중으로 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였습니다. 2048년에는 물리적, 인지적 구조 또한 공기중으로, 혹은 데이터 클라우드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1848년에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농장에서 직장을 잃었고,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공장에서도 자신의 성별을 바꿀 필요나 새로운 감각을 개발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직물공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나면 남은 인생은 그 일을 하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48년 사람들은 어쩌면 가상 공간으로 이주해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별 역시 바뀔 수 있으며 인체에 이식된 컴퓨터에 의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하게될 수 있습니다. 3차원 가상 현실 게임에서 최신 의상을 디자인하는 직업이 이미 존재하며, 10년 내로 이 특정한 직업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예술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인공지능이 도입될 수 있습니다. 즉, 25살 때 연애 사이트 프로필에 “런던의 옷가게에서 일하는 25살의 이성애 여성”이라고 썼던 여인이 35살 때는 “나이는 조정 중이고 성별도 따로 없음. 뉴코스모스 가상세계에서 신피질 활동을 하며, 인생의 목적은 지금까지 어떤 패션 디자이너도 가보지 못한 영역을 가보는 것”이라고 쓰게될 수 있습니다. 45살 때는 연애나 자기소개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저 적절한 알고리듬이 내게 딱 맞는 상대방을 찾거나 – 아니면 만들어 – 줄 겁니다. 패션 디자인 예술 분야는 알고리듬이 너무나 발달한 나머지 과거 당신이 만들었던 가장 뛰어난 작품 조차도 자부심 보다는 창피함만을 느끼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45살이면 아직도 지켜보아야 할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충분히 더 남아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구도 우리가 보게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미래도 실제 진실과는 거리가 멀겁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21세기 중반의 세상을 설명하고 그 내용이 마치 과학 소설처럼 느껴진다면, 그 예측은 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다른 이가 21세기 중반을 당신에게 설명하는데 그 내용이 전혀 과학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확실히 맞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미래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이러한 심오한 변화는 삶의 기본적인 구조마저도 그 가장 확실한 특징을 바꾸면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기 전의 오랜 과거부터 인간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일을 배우는 시기와, 그 일을 하는 시기입니다. 삶의 전반부에 우리는 지식을 축적하고, 기술을 갈고 닦으며,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우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었습니다. 열 다섯살의 나이로 학교를 가지 않고 하루 종일 가족이 소유한 논에서 일하더라도, 그 시기 가장 중요한 것은 논 농사를 하는 방법과, 대도시에서 온 욕심 많은 곡물 매매상을 상대하는 법, 옆 논의 주인과 물과 땅을 두고 생기는 충돌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삶의 두 번째 시기에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돈을 벌며 세상을 탐험하고, 사회에 기여하게 됩니다. 물론 50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쌀에 대해, 상인과 이웃에 대해 배울 수 있지만, 이는 일찌감치 배웠던 내용을 조금더 섬세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21세기 중반의 세상에서, 급격한 변화의 속도와 길어진 수명은 이러한 과거의 모델을 무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은 점점 더 잘게 쪼개지며, 각 구간은 연속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중요하고 복잡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수준의 스트레스를 포함합니다. 변화는 언제나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일정한 나이 이후 사람들은 변화를 꺼려하게 됩니다. 15세의 아이에게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는 것입니다. 신체가 자라고 생각이 깊어지며,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며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개발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십대는 이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이를 신나는 일로 즐깁니다. 그러나 50살이 되면, 이제 변화는 두려운 것이 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과 싸우기를 포기합니다. 이미 가 보았고, 직접 해 보았고, 남은 것은 티셔츠 뿐입니다. 안정적인 삶을 선호합니다. 지금 가진 기술과 경력, 정체성과 세계관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일수록 이를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나갈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50대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을 크게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뇌과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비록 성인의 뇌 또한 과거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는 더 유연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십대의 유연한 뇌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뉴런을 다시 연결하고 시냅스를 추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는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정체성을, 직업을,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떨어진 사람이 될 뿐입니다. 기대수명의 증가는 당신을 살아있는 화석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이제 50살은 충분히 젊은 나이일 것이며, 따라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 단순히 경제적인 면을 넘어 사회적으로 –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을 재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소함이 새로운 표준이 되는 시대에 당신의 과거 경험과 다른 모든 인류의 과거 경험은 예전처럼 믿을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개인으로써의 한 사람과 전체 인류는 초지능 기계나 강화 신체, 인간의 감정을 믿을 수 없이 정밀하게 조종하는 알고리듬, 인류에 의한 기후 격변, 매 십년 마다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급격한 변화 등 지금까지 어떤 인류도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대해야 합니다. 완벽하게 전례가 없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막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이를 흡수하거나 분석할 방법이 전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청난 불확정성이 세상의 우연한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특성일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적 적응력과 충분한 감정적 균형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당신이 가장 잘 아는 영역을 때로 포기해야 하며,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히도, 아이들을 알 수 없는 것들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게 만들도록 가르치는 것은 물리학 공식이나 1차대전이 발발한 이유를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으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 역시 20세기 교육을 받았으며, 이때문에 21세기가 요구하는 지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산업혁명의 결과 우리는 마치 생산라인과 같은 교육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을 한 가운데 커다란 콘크리트 빌딩이 서 있고, 내부에는 수많은 동일한 교실이 있으며, 각 교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일렬로 늘어서 있습니다. 종이 울리면, 같은 해에 태어난 서른 명의 아이들과 함께 그 중 한 교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매 시간, 어른 한 명이 들어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 일로 정부에서 봉급을 받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지구의 형태를 이야기하고, 다른 이는 인류의 역사를, 또다른 이는 인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비록 인류가 이 방법으로 커다란 진보를 이루어냈다는 것을 부정할 이는 없겠지만, 이제 이 모델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쓸만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캘리포니아 교외와 같은 선진국 뿐만 아니라 멕시코 시골에도 적용가능한 모델은 없습니다.

3부: 인간에 대한 해킹

지금 내가 멕시코나 인도, 앨라배마의 구식 학교를 다니는 15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어른들을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들 또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방법이었고, 이는 그들이 세상을 잘 알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이 느리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릅니다. 점점 더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며, 어른들이 말하는 정보가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지, 아니면 오래된 편견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요? 기술일까요? 하지만 기술은 더 위험요소가 많은 도박입니다. 기술은 여러 면에서 당신을 도와줄 수 있지만, 기술이 당신의 주도권을 가져갈 경우 이제 당신은 기술의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전, 인류는 농업을 발명했지만, 이 기술은 소수의 엘리트만을 살찌웠고 다수 인류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가 뜰 때 부터 해가 질 때 까지 잡초를 뽑고, 물을 나르고, 뜨거운 태양 아래헤서 옥수수를 수확해야 했습니다. 같은 일이 지금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술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확실하다면, 기술은 당신이 이를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삶에서 원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기술이 당신의 목표를 조종하고 당신 삶을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기술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당신은 점점 더 기술이 당신에 봉사하기 보다 당신이 기술에 봉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환한 스마트폰에 처박고 배회하는 좀비들을 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그들이 기술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기술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럼 당신 자신에게 의지해야 할까요? 이 말은 세서미 스트리트(역주: 미국의 교육용 프로그램)나 옛날 디즈니 영화에서 나올때는 그럴듯하게 들렸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디즈니도 이제 이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 앤더슨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 할 때 조차도 외부에서 가해지는 조작의 희생양이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의 소리는 절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우리 뇌가 본래 가지고 있는 생화학적 오류 외에도 국가나 이데올로기, 상업적 광고에 쉽게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 기술과 기계학습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은 더 쉽게 조작될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 아마존, 바이두 혹은 정부가 당신을 조종하는 방법을 파악하고 당신이 반응하는 약점을 누를 때, 과연 당신은 당신의 진짜 자신과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자신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 교훈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교훈이기도 합니다.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죠. 사실 철학자와 선지자들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충고는 21세기 오늘날 그 어떤 과거보다도 더 중요한 조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자나 소크라테스의 시대와 달리, 이제 당신을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이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코카콜라, 아마존, 바이두, 그리고 정부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스마트폰이나 당신의 컴퓨터, 당신의 은행 계좌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을 속속들이 이해하려 합니다. 당신은 오늘날이 컴퓨터 해킹의 시대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진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는 바로 인간을 해킹하는 시대입니다.

알고리듬은 지금도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사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보고 있습니다. 곧, 당신의 모든 걸음걸이, 모든 호흡, 모든 심장 박동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빅데이터와 기계학습 기술을 이용해 당신에 대해 점점 더 잘 알게될 것입니다. 이 알고리듬이 당신을 당신보다 더 잘 알게되는 순간, 이제 그들은 당신을 조종하고 조작하게 될 것이며, 당신은 그저 이를 지켜볼 수 밖에 없게될 것입니다. 당신은 매트릭스와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알고리듬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신보다 더 잘 이해한다면, 당신을 움직이는 권력 또한 알고리듬이 가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알고리듬에게 모든 권력을 기꺼이 이양하고 알고리듬이 당신에게 최선의 것을 선택해 주리라 믿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저 편안하게 세상의 발전을 지켜보면 됩니다. 사실 당신이 특별히 해야할 일도 없습니다. 알고리듬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줄테니까요. 그러나 혹시 당신이 자신의 존재와 미래에 어느 정도 주도권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알고리듬보다, 아마존과 정부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하며, 그들이 당신에 대해 파악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더 잘 알아야 합니다. 빨리 뛰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모든 환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건 매우 무겁기 때문입니다.

(와이어드, Yuval Noah Har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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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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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기적, 그리고 나와 우리의 미래"

 

▷ 일시 : 2014년11월18일(목) 저녁 7시
▷ 
장소 : 에코팜(종로2가 YMCA 1층)
▷ 이야기 손님 : 도법스님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다르고 입장도 다르기에 말하기 쉽지 않지만, 저는 한국 사회의 통일 문제, 남북 문제를 푸는 데 있어 서로 편갈려서 불신하는 남남갈등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걱정하는 분들은 많이 계신 것 같은데 드러내 놓고 이야기해 보자 하는 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북한 문제를 많이 다루는 분들은 계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지리산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2000년 초부터 지리산운동을 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남남갈등 또는 남북분단의 문제 이런 문제를 풀어 가려면 관계된 구성원들이 어떤 형태로든 만나고 대화하고 때로는 미안하다고 이야기도 좀 하고 잘못했다고 이야기도 좀 하고 이래야 문제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모여진 것이 생명평화운동입니다. 생명 평화를 주제로 하면 누구나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생명 평화는 진보냐 보수냐 관계 없지 않습니까? 남이냐 북이냐도 관계 없고 친미냐 반미냐, 친북이냐 반북이냐도 관계 없을 것 같고 노동자냐 자본가냐? 기독교냐 불교냐? 이런 것들을 넘어서서 만날 수 있는 가치잖아요. 남북문제는 좌우의 극단적인 대립인데 이 문제를 던져 놓고 이야기 해보자. 그러면 우리가 쌓아 놓았던 벽을 넘어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루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해서 그 운동을 쭉 해왔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그럽니다. 

“네 색깔이 무어냐?” 묻는 사람도 있고 “네 정체성이 도대체 뭐냐?”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회색분자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네 행보는 도대체 뭐냐?”, “나는 갈 지(之)자 행보다. 나는 회색분자고 갈지자 행보를 하는 사람이니까 여기가든 저기가든 그냥 좀 놔둬라.” 하고 말합니다.

지금 어쨌든 제가 알고 있는 수치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재판 건수가 대략 630만 건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60배입니다. 또 갈등으로 인한 손실이 약 300조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도 누가 자료를 줘서 보니까 우리 사회에 믿을 구석이 없다는 불신의 수치가 어마어마하게 높더라고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깨진 것이지요. 재판 자리에서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재판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말하면 모두가 싸움의 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300조에 이른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부분이겠지요. 


“싸우는 사람은 있는데 싸움을 말리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은 국가 체계로 보면 정부가 또는 정치인들이 해야 할 몫인데, 그런데 정부도 싸움의 당사자가 되어있습니다.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계속 국론을 분열시키고 대립하게 만듭니다. 대부분 보면. 정치인들도 그런 것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싸움판이 있으면 이것을 말라고 풀어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싸우는 사람은 있는데 싸움을 말리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 뭐하냐 물으면 “세력분자를 세력화하는 것이 내 관심사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면서 우리 문제를 다루고 풀어가는 사회가 좀 그렇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가져단 준 것들.

세월호 문제 참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 일이 정쟁거리로 갑니까?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정부가 못해주니까 유족들이 진실을 알고 싶다고 들고 나온 건데, 정부가 못하면 국민이라도 나서서 그것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유족들은 지금 너무 힘든 상황이니 우리가 나서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들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 세월호 사건이 난 것도 기가 막힌 일이지만 이렇게 유족들이 거리로 나서게 만든 우리 사회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부가 나쁘다고 백날 이야기 해봐야 입만 아프고 한국 사회도 보면서 참 큰일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세월호 현상에서 중요한 몇가지 생각들을 했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세계관, 가치관, 삶의 방식 한국 사회의 구조나 풍토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 이런 것들이 다 담겨 있는 게 세월호 사건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월호가 우리의 문제도 다 드러나게 했지만 동시에 우리의 문제를 푸는 길도 다 내놓았다고 봅니다. 문제를 드러나게도 했지만 문제의 해답도 보이게 내놓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고 봅니다.

사건의 현상만 놓고 보면 특별법 만들어서 법적으로 다루는 것도 그것대로 잘 해가야 한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족들이 원하는 대로 특별법을 만들고 법적으로 다룬다 하더라도 그것이 할 수 있는 한계는 뻔하다고 봅니다. 세월호가 드러낸 문제가 무언지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법적으로 물을 것만 묻고 있는 것이지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나 가치 의식이나 사회 방식이나 또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나 관행적인 문제들 풍토적인 문제들을 다 드러낸 사건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법적으로만 다루어서 다 짚어질 일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들 본질적인 문제들이 있는 것이고 어쩌면 세월호 문제는 그렇게 갔어야 맞는 일인데 특별법 문제에 꼬여서 - 물론 이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기본적인 것인데 - 거기에 다 소진해 버린 느낌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국론 분열을 불러오면서 말입니다. 

세월호 문제가 그런 총체적인 문제를 다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정말로 아주 본질적인 문제부터 현상적인 문제까지 정확히 짚어내는 일이 문제를 풀어내는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법적으로 하는 것은 법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만 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문제를 잘 짚어내면 해답은 거기서 나오리라고 봅니다.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에서 몇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제 역할을 할까 합니다. 세월호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반응이 몇가지로 표현이 되었었지요. 그중에서 이런 표현이 중요하게 생각되더라고요. 

“제발 살아있어만 다오”, “제발 함께 있어만 다오” 이런 반응. 평소에는 내 마음에 드냐 안드냐 나하고 친하냐 안친하냐 나에게 이익이 있냐? 없냐?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 또 엄마 아빠는 내 말을 잘 듣냐 안 듣냐? 이런 것들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는 그런 것 보다 더, 그 이전에 또는 그것을 넘어서 내 딸로 내 아들로 내 친구로 내 이웃으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될 한 사람으로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잖아요. “살아 있어만 다오 제발 함께 있어만 다오” 그 외에는 다 두 번째 문제인 것이지요.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 내 마음에 드냐 안 드냐 나랑 친하냐 안 친하냐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 그런 것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내 아들, 내 딸, 내 친구, 내 이웃,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할 구성원, 한 인간으로 살아 있어만 다오 하는 그 마음은 어떤 것보다도 생명을 가진 한 인간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각성은 놀라운 것이라고 봅니다. 온 국민이 함께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이런 부분들은 세월호가 우리에게 준 기적적인 선물이라고 봅니다. 

세월호 사건이 왜 일어났습니까?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사람보다 권력, 사람보다 명예, 사람보다 출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원인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온 국민이 ‘아 우리가 그동안 그것을 잘 몰랐었구나 잘 못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돈 보다도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재산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이란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인간 존재 가치에 대해서 온 국민이 눈을 뜬 사건. 전 이것은 정말로 그분들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씀이겠지만 ‘세월호가 우리에게 준 기적적인 선물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같은 맥락이지만 “미안해”, “잘못했어”, “이제 달라질게” 그런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어떤 말이겠어요, 아까의 그 이야기와 연결되는 맥락입니다. 네가 내 아들로, 내 딸로, 내 친구로, 내 이웃으로 동반자로 사는 것 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왔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미안하다는 이야기잖아요. 내가 잘 모르고 살아왔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이제 달라질게, 새로워질게 이게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모르긴 몰라도 진보다 보수다, 노동자다 자본가다, 관이다 민이다, 여다 야다. 경상도다 전라도다. 이런저런 이유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데 그 사건을 대하고 국민들이 일으킨 반응은 사실은 거의 다 같았죠 온 국민이 같은 마음이었죠. 

그리고 그 다음엔 
"잊지 않을게, 기억할게, 헛되지 않게 할게 값지게 할게. 세월호 이전의 나와 대한민국하고 세월호 이후의 나와 대한민국이 반드시 달라지게 할게" 하는 다짐이 있었습니다. 

그 반응들을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특정인들만 그렇게 반응한 게 아니라 온 국민이 그랬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함께 하는 현상을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다 편 가르고 있었지요. 붉은 악마 현상 같이 그나마 크게 논란 없이 온 국민이 함께 했던 것이지만 그것은 민족 감정, 경쟁심, 승부욕 같은 것이 건강하게 분출된 현상이었습니다. 세월호는 그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친분 관계가 없는 누군가의 슬픔, 고통, 문제를 마치 나의 슬픔처럼, 고통처럼, 문제처럼 온 국민이 함께 한 현상입니다. 전 이 현상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봅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누군가의 고통을, 누군가의 아픔을 나의 슬픔으로, 고통으로, 문제로 한 것이 바로 거룩한 마음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 인간적인 마음이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이 있을까? 참으로 이것은 인간적인 마음, 아름다운 마음, 거룩한 마음입니다. 짧은 시간이다 하더라도 온 국민으로 하여금 이렇게 거룩한 마음을, 인간다운 아름다운 마음을 일으키게 한 것이 세월호 사건인데 이건 기적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저는 세월호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말이 생겨서 욕도 얻어먹고 곤란해지니까 주변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10년은 천착해야 하는 세월호 문제

저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 문제에 적어도 10년은 천착(穿鑿)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속담에 “귀신은 무서워하면 자꾸 덤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편한 것을 피하지 말고 마주해서 이를 풀어내야지 이를 자꾸 피하면 계속 불편한 상황에서 달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힘들고 불편한 것은 피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힘들고 불편하다고 자꾸 피하면 계속 그런 상황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정직하게 맞이하고 정직하게 풀어내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가 던진 화두를 붙잡고 10년은 천착을 해야 지금 다짐한대로 세월호 이후의 나와 대한민국이 달리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달라진다는 게 그리 간단할 턱이 없지 않습니까? 온 국민의 누군가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처럼 함께 했다는 사실 이것이 세월호가 우리에게 준 첫 번째 기적의 선물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그 기적을 실현해 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못할게 뭐 있겠습니까? 저는 온국민이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통일도 남북 문제 풀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거기에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기독교냐 불교냐 하는 벽도 허물어졌고, 여냐 야냐 하는 벽도 허물어졌고 관이냐 민이냐 하는 벽도 허물어졌고 진보냐 보수냐, 자본가냐 노동자냐 경상도냐 전라도냐 하는 벽도 허물어 졌습니다. 모든 벽을 넘어선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모든 벽을 허물고 서서 사람으로 구성원으로 만나고 함께 했던 이런 내용을 나의 이익이냐 편의냐 이런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 누군가의 슬픔, 누군가의 문제를 나의 슬픔처럼, 아픔처럼, 문제처럼 함께 했던 그 고귀한 마음들을 어떻게 생활화할 것인가 이것을 어떻게 사회화 할 것인가가 나머지 과제라고 봅니다. 만약에 그 거룩한 마음이 한사람 한사람에게 생할화되어질 수 있고 사회화 되어 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의 실현이라고 봅니다. 그 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에 어디 가서 이야기 할 기회가 생기면 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 가슴으로는 세월호와 연결시키지 않고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세월호를 덮어놓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안될 것 같은 마음입니다. 저는 싸움은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그런 중간 지대가 탄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싸우고 있을 때 누가 말리면 못이기는 척하고 그만두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리는 이가 없으면 싸우다가 갑자기 그만둘 수도 없잖아요. 누가 안 말리면 그냥 계속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누가 강력히 말리면 그리고 설득력 있게 말리면 또는 힘 있게 말리면 못 이기는 척 물러서기도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기도 하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도 저는 그런 제3지대에 사람들이 힘 있게 있으면 좋겠다 그 길을 열어보자 해서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그러는데요. 


생명평화운동을 하는 이유



 


이 그림은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을 하면서 만들어진 그림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이루어진 곳인지 또는 인생이란 뭔지 나는 또 어떤 존재인지 내가 만나는 너는 누구인지 생명은 또 어떻게 생겼는지 이런 물음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될 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을지 이런 물음에 대한 그림설명입니다. 

인간이 알아야 될 것은 두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현대인들을 보면 가장 큰 문제가 자기 존재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존재에 대한 관심이 없으니까 당연히 자기존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요. 달리 이야기하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야 인생이 괜찮은가 하는 이런 물음이 없는 것이지요.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두가지 물음이지요. 그런데 다른 것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정도로 다른 것은 지식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것이지요. 막말로 이야기하면 무식한 것이지요. 또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다루는 능력은 대단히 출중합니다. 못 다루는 게 없을 정도이지요. 그런데 자기를 다루는 능력은 또 제로입니다. 자기를 다루는 능력은 무능력에 가깝습니다. 

‘무식하고 무능력하다’라는 질문을 던져 보면 현대인들은 대단히 무식하고 무능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 것인지 이 두가지가 인생에게 던져진 가장 중요한 화두라 할 수 있겠는데 현대인들의 경향을 보면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존재의 가치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게 마치 인생을 잘 사는 것처럼 거기에 다 골몰하고 있지요. 그것이 얼마나 자기 존재 가치를 형편없게 만드는지 그게 얼마나 삶을 파괴적으로 몰고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인간은 당연히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데 미안해하지도 않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따지고 보면 자기존재에 대한 무관심, 무지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 그림을 가지고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내 생명은 내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생명은 네안에 있고 내 생명은 내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너는 너고 나는 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 없이 나 혼자도 살 수 있어. 여기서 더 나아가면 차라리 네가 없는 것이 더 좋겠어. 여기 사과가 하나 있는데 혼자 있으면 혼자 다 먹을 수 있지만 둘이 있으면 나눠 먹어야 되잖아요. 그러니 네가 없는 게 내게 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좀 더 가면 너 없애고 나만 하겠어.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경쟁의 상황이지요. 너를 없애고 나 혼자 하겠어. 이런 것이지요, 그것은 네 생명은 네안에 따로 있고 내 생명은 내안에 따로 있다는 이런 생각 이런 신념체계에 따르기 때문에 너 없이 나 혼자 살 수 있어 너 없는 게 더 좋아 너 없애고 나 혼자 하겠어 이런 것이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과 대립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실제로 없습니다. 분리 독립되어서 따로따로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이나 말이나 글로만 가능하지 실제로는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거북이털, 토끼뿔 같은 것입니다. 토끼뿔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있지요. 말로도 할 수 있지요. 글로도 쓸 수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 토기는 뿔이 없습니다. 그건 그냥 관념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으로 있는 것, 말로 있는 것, 글로 있는 것이 진짜 있는 것처럼 믿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예로 짚어 보면 한국 사회에서 1등이 최고야 부자 되면 행복해 이런 놀이인 것이지요. 정말 1등이 최고인가? 정말 1등이 되면 희망이 있는 것일까? 정말 부자가 되면 좋을까? 부자는 행복할까? 생각이나 말이나 글로는 그럴 것 같지만 실제로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대단히 위험한 거짓말이지요. 대단히 나쁜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이게 진짜인 것처럼 사람들은 다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요즘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너 커서 뭐 될래? 물어 보면 65%가 부자되겠다고 합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 아빠가, 삼촌이 선생님이 어른들이 부자가 좋은 거라고 하니까 부자 되면 행복한 거야, 너도 부자되야 해라고 말하고 새해 덕담도 이렇게 바뀌지 않습니까 새빨간 거짓말을, 나쁜 거짓말을 어른들이 진짜처럼 믿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거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렇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면서 이 사회가 어떻게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바랄 수 있을까? 이러면서 어떻게 인간다운 사회가 가다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건 도저히 인간다울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대다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합니다.


자, 이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태양이 없는 지금 내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이 없으면 나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냥 현상으로만 보면 태양과 나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없으면 여기의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처도 별 수 없고 예수도 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태양과 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물의 그물코들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되어 있고 서로 관계 맺고 있고 서로 영향과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존재합니다. 온 우주의 시간, 공간, 유형, 무형, 내면, 외면, 정신, 물질, 인간, 자연 어떤 형태로 표현되어 지던 분리독립되어 따로따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관념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실제는 그런 거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존재도. 태양과 나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그 여타의 모든 관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내 생명은 나 아닌 다른 것들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 제외시켜 놓고 보면 나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의 살이있는 그물이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떻게 생겼는가? 현대과학에선 생명그물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는 하나의 살아있는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 낱낱의 존재들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어있고 의지하고 관계맺고 도움을 주고 받으며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렇게 생명의 실제 내용을 확인해 보면 전부 연결되어 있다면 세상에 내 생명 아닌게 있겠습니까? 여기 물이 있는데 물과 내 생명을 놓고 봤을 때 어떤게 더 중요하겠습니까? 당연히 습관적으로 인간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 하지요. 그런데 물이 없는 인간의 생명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물이 곧 인간의 생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게 분리되어 있으면 가치의 우열을 이야기 할 수가 있는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만 더 중요하고 물의 가치는 별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진실은 세상은 함께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산다는 것! 이게 온 우주의 존재법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길은 함께 사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함께 사는데 인생을 걸어본 적 있십니까? 기독교인들이 평화를 이야기 할 때 불교인들을 포함시키겠습니까? 당연히 안하지요 불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현상이 뭡니까 종교전쟁이지요.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자고 이야기는 합니다. 그런데 온통 내막을 들여다 보면 패거리 싸움입니다. 국가란 이름으로, 종교란 이름으로, 민족이란 이름으로, 지역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또 다른 이해타산으로 패거리싸움을 하교 있습니다. 나와 내편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상대와 상대편을 공격대상으로 삼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격하고 짓밟고 파괴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왜그럴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에 그런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라는 것을 안다면 내가 머리를 싸매고 열정을 바쳐서 해야하는 것은 함께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싸워서 이기는 길만 추구해 왔습니다. 너와 나 이웃과 이웃 또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세상이고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든 편갈라 싸우면서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저도 종교인입니다만 인류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약 60~70%가 종교전쟁이라고 합니다. 허울만 종교인 것이지요. 인간이 하는 일중에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전쟁인데 어떻게 종교의 이름을 전쟁을 벌이는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종교가 일으키는 전쟁이 말이됩니까 그런데 그것이 엄연히 역사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는데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이유는 첫 출발점은 바로 ‘나는 누구인지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이런 것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가 무관심하고 무지하고 또는 잘못할고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나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세상이기에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찾아가야 할 길은 함께 사는 길이라고 봅니다.

남북문제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세계관만 투철하다면 남북문제를 푸는 방식도 달리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얼마전 탈북자간첩조작사건 변호인과 당사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건 정말 생으로 간첩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는 북한을 함께 살아야 할 동포로 볼 것인가? 제거해야 할 악마로 볼 것인가? 동포로 본다면 간첩조작 같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제거해야 할 악마로 보기에 이런 간첩조작 사건 같은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이 문제를 안풀고는 남북문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동포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남북문제의 해법도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 함께 산다는 것

결국 우리가 인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에 부실하게, 투철하지 않게 천착하고 살았기 때문에 저는 세월호라 하는 비극이 벌어졌다고 봅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서로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고마워하고 배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꾸만 하나 되자고 하는데 하나가 되면 안됩니다.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여기 이 바닥과 내가 하나가 되면 걸을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따로 떨어져도 허공을 밟고 걸을 수는 없기에 역시 걸을 수 없습니다. 굳이 이야기 하다면 왼손과 오른손 같은 것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몸으로 보면 한몸인 것이고 그러면서도 분리된 다른 손이지 않습니까

하나이면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고 분리되어 있으면서 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이분법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관념적으로 불의는 싹 없애버리고 정의만 넘쳐나는 세상을 바랍니다. 그러나 과연 불의가 없고 정의만 존재하는 세상은 가능합니까? 그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손바닥과 손등 같은 것이고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정의와 불의가 동전의 양면이라 한다면 정의와 불의를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인생이란 뭔지 사실적으로 확인해 보면 어떻게 살 것이냐가 저절로 해답이 나옵니다.
 너 없는 나는 존제할 수 없게 때문에 너의 존재가치, 너에 의지해서, 나무에 의지해서, 태양에 의지해서, 이웃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부모에 의지해서 물에 의지해서 밥 의지해서 존재하고 상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나를 낳아서 질러주었기 때문이니 세상에 내 생명에 하느님, 부처님, 어버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있게끔 만든 그 누군가의 존재가치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보호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편안하고 따듯하고 인간다운 사람이 될 것이고 이런 대접을 받으면 역시 기분 좋을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게 함께 사는 길이라고 봅니다. 단순합니다. 복잡한 논문, 박사학위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삶이 복잡하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숨을 쉬기에 살고 숨은 저절로 쉬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는 숨쉬기를 세월호의 아이들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조건을 누군가가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공짜가 아닙니다. 저 하늘의 태양이 숨을 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곧 돌아올 엄동설한에 저 산위의 나무들이 제 할을 을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은 온 우주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자기 위치에서 제 역할을 정상적으로 해 주기 때문에 숨을 절로 쉴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내가 숨을 쉬면 사는 것입니다. 즉, 온 우주의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누군가의 신세로 우리가 살고 있다면 나도 그 도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삶은 엄중합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짜입니다. 가장 무서운 가치도 가장 위대한 가치도 공짜입니다. 가장 비싼 가치도 공짜입니다. 왜 그럴까요? 공로 숨을 못쉬면 인간은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꼭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삶을 소중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가능하게 새주는 이 세상에 대한 당연한 도리로서도 우리 삶을 잘 살아야합니다. 

저는 오히려 우리가 세월호라는 화두를 통해서 우리 삶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과 근원적 자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온 국민이 해야하는 일이지 대통령이, 장관이, 국회위원 몇 명이 해야하는 일인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세월호의 비극은 계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월호가 준 기적의 선물을 잘 파악하고 이 기적의 선물의 실제 삶으로 사회로 구현될 수 있게 하는데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마음들이 모아지면 희망래일이 고민하는 통일문제도 멋있게 바람직하게 푸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2014년 희망래일 대륙학교 녹취록입니다.
* [녹취 : 이종수]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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