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은 책, #박물관에서_서성이다

 

그중 한 챕터가 인상 깊어서 옮겨 본다.

 

협객의 정신이 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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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俠客)

 

민화에 대한 관심과 인기에 힘입어 민화 강좌는 물론 전공을 개설한 학교들도 있다. 직간접적으로 민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민화에 대한 제도권의 관심과 후원을 기대하기도 한다. 우리 겨레의 독보적인 예술 양식인 민화도 하나의 예술 장으로 인정받고 관련 지원책도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화는 과거 문화유산의 한 유형인가 아니면 예술로서 계승/발전시켜 가야 할 분야인가? 문화재로서의 가치인지 지속적인 현재성을 가진 예술 활동인지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민화를 문화유산으로 접근한다면 문화재 관리 기준을 따르면 된다. 발굴된 자원을 보존/관리하고 연구/전시를 통해 당대의 사람들이 지향했던 가치와 의미를 탐색해 오늘의 지표로 삼으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은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진다는 뜻이다. 시대를 넘는 생면력은 바뀐 시대의 가치를 수혈했을 때라야 가능하다. 민화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 어떤 가치를 수혈해야 할까? 현대인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민화를 걸어놓지도, 자신의 원망을 민화에 투영시키지도 않는다.

 

요즘 민화를 배우는 이들은 조선시대 민화를 따라 그린다. 몇 가지 범본을 정해 놓고 이것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필력이 생기면 새로운 표현소재를 도입/적용한다. 이러한 방식을 옛 조선 민화와 견주어 현대 민화(창작 민화)’라고 한다. 우리의 전통 회화 규범에는 모//방의 절차가 있다. 모는 원본을 밑에 깔고 그대로 베끼는 것이고, 임은 원본을 옆에 놓고 따라 그리는 것이며, 방은 모/임을 거친 뒤, 원직을 기초로 자신의 방식을 가미해 그리는 것이다.

 

전통 회화의 규범은 그 시대의 논리와 당위성이 있어 그렇게 행해졌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규범이 유효한지는 의문이다. 그림을 따라 그리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의 정서적 쾌감이나 희열을 맛볼 수는 있다. 표현력과 창작력이 뛰어난 사람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누리는 생활 예술’, ‘삶의 심미화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이 민화의 현대적 계승은 아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라고 하여 민화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일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활동으로서의 의미는 있지만, 후대에까지 전해지는 예술 장르나 작품이 되기는 어렵다.

 

그림이란 표현과 내용의 합이다. 조선 민화는 아마추어인 서민이 아니라 대체로 화원이나 화승들이 그렸다. 즉 표현은 프로들의 역할이었다 해도 그 안에 담긴 것은 민중들의 원망과 사고체계이다. 그래서 민중의 그림이라는 개연성이 성립된다. 여기서의 민중이란 서민만이 아니라 사대부, 귀족까지 누구나를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일본인들은 막 만들고 막 생겨 먹은 조선의 막사발을 가져다가 잘 다듬어진 다도의 질서 속에 편입시켰다. 그들의 다도를 위해 필요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막사발을 위해서는 아니다. 언제 막사발이 자신을 대단하게 봐 달라고 했던가? 그리하여 지금은 진짜 막사발은 다 사라졌고 기획된 짝퉁 막사발, 복제 막사발들이 난무한다.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사발만이 아니라 막사발의 영혼까지 사라졌다. 들판에서 비바람 맞으며 자란 나무를 안온한 정원에 옮겨 심은 꼴이다. 야생은 야생일 때 생명력이 있다.

 

민화의 예술적인 책무는 협객이 아닐까? 태생과 성장이 그러했듯이 민화는 강호와 들판을 서식지로 하는 외톨이다. 그래서 그 표현 또한 ()’하다. 세련된 도회의 정서가 아니어서 촌스럽다. 협객은 성안의 벼슬자리를 탐하지 않으며 성 안의 장수들과 누가 더 센지 겨루지 않는다. 자신의 명분을 침해하려는 자가 나타났을 때만 기꺼이 나설 뿐이다.

 

민중의 원망과 기원이 투영되어 있으며 팍팍한 일상을 위로해 주는 것이 민화다. 민화를 보면 통쾌하다. 눈치 보지 않는 당당함,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움과 권위를 무시하는 도전성이 그렇다. 제도권의 인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체제의 질서로 편입되고 싶다는 욕망이다. 장으로 등극하여 제도 안에서 식재(植栽)되는 순간 그 역동적인 본능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은 예술 작품을 획일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콘텐츠와 정보기술을 이용해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하고 소비하는 능동적인 시대다. 대중은 정형화되고 규준화된 미적 질서를 좇는 근대적 미관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불균형과 경계를 해체한 기이함, 낯섦 같은 야()한 것에 열광한다. 사회학자 마페졸리(Michel Maffesoli)는 현대를 재주술화(再呪術化)의 시대라고 했다. 상상력으로 가득한 낭만의 바람이 불어온다. 모호한 불안, 스펙터클한 혼돈이 예견되는 21세기 강호에서 민화는 여전히 협객이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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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서

그냥 책 2021. 3. 3. 17:00

독서에서 중요한 부분은

 

글의 핵심을 파악하기, 글의 논리구조를 이해하기, 

그리고 글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까지 추론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줄 아는 능력이다.

 

_ <하브루타 독서토론 교과서>에서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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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를 읽고 있다. 나랑 맞는 책 같다. 아니 장강명 작가가 나랑 성향이 맞다고 해야 할까? 내가 한참 바닥이겠지만.

 

어제는 <부잣집 딸과 결혼하겠다는  생각과 인간이  스스로를 가축화한 과정>이라는 대목을 읽었다. 

<동물농장>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대충은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대목 뒷부분 문단이 오래 남아 있어 남겨둔다.

 

조지 우웰의 <동물농장>과 <1984>를 언급하며 하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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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설에서 오웰의 관심은 명백하게 '누가'보다 '어떻게'를 향한다. 저널리스트였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구 지식인들이 진영 논리('누가'의 문제)에 빠져 소련의 실체를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눈 감았을 때 오웰은 그러지 않았다. '누가'를 따진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파시즘과 자본주의에 맞서 싸운 체제라고 믿었다. '어떻게'를 살핀 오웰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공통점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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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에 견주어 말해도 모자람이 없지 싶다. 모임이 조직이 공동체가 '누구'에 의해 움직여져야 하는지에 눈길을 돌릴 게 아니라, 모임지 조직이 공동체가 단체가 '어떻게' 굴러가야 하는지에 더더 더 눈길을 돌리고 길을 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니면 안 돼!' '쟤들만큼은 안 돼!' 이런 지저분한 모습 좀 되풀이 안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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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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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걸>을 읽고 있다. 1/3도 채 안 남았다. 

그동안 읽으며 마음이 움직인 부분을 여기 담아둔다.

문장은 조금 고친 부분이 있다. 내 눈에 거슬리는 표현을 내 맘대로 바꿨다.

뭐, 내 기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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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77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어려운 일은 환자들에게서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해 점점 커져가는 나의 무관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임을 깨달았다. 처음엔 수수께끼 같던 그 문장이 이제 내게 일상이 되었다. “그들은 안으로 향해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어야 하지만, 자신의 심장은 절대 포만감을 주지 못했다.”

 

79

나는 내 삶을 구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90

나는, 주네의 어린 시절 어떤 점이 그가 성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동시에 성공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만들었는지를 알아내는 데 거의 집착하고 있었다.

 

91

한 번은 파블로 피카소가 직접 주네의 보석금을 내주기까지 했어앞뒤가 맞질 않지.” 내가 말했다.

아마 자기 자신에게는 앞뒤가 완벽하게 맞는 일이었겠지.” 빌이 반박했다. “누구나 자기도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는 별 이상한 짓을 할 때가 있잖아. 단지 아는 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뿐이고.” 그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잠깐 생각해 봤다.

 

97

이파리들은 단 하나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만들어졌다. (~) 그 임무에 인류의 운명도 달려 있다. 이파리들은 당을 만든다. 살아 있지 않은 무기물에서 당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우주에서 식물이 유일하다. 우리가 태어나서 먹은 당은 모두 식물 잎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뇌에 포도당을 꾸준히 공급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는다.

 

106(‘오팔이라는 광물질을 처음 발견한 날)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14

그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진짜 내 첫 이파리였다. 세상의 모든 대담한 씨앗들처럼 나도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거기 맞는 해결책을 찾아가며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다.

 

150

버섯이 곰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남자의 성기가 곧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버섯의 머리는 그것이 엄청나게 맛있든 치명적인 독을 가졌든, 더 복잡하고 완전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유기체에 부착된 생식기에 불과하다. 모든 버섯 머리 아래에는 길게는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균사 조직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흙덩이를 감싸며 그물처럼 퍼져 땅의 모습을 보존한다. (~)

 

153

흙은 참 묘하다. 그 자체가 대단한 존재는 아닌데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서 생긴 산물이라는 점에서 묘해진다. 흙은 생물의 영역과 지질학의 영역 사이에 생긴 긴장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낙서 같은 것이다(~)

주변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살아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 우리 눈에 보이는 언덕들만큼이나 오래된 그 돌들은 언덕들만큼이나 호흡도 움직임도 없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두 극단의 상태, 즉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들 사이에 물리적으로 놓인 모든 물질을 바로 우리가 이라고 부른다. 흙의 맨 위층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의 영향이 가장 많이 보인다. 죽은 식물이 시들고 썩고 점액들과 섞여서 어두운 갈색으로 주변을 물들인다. 흙의 맨 아래층은 바위들이 남긴 유산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물은 바위를 조금씩조금씩 녹여 반죽으로 만들고, 말랐다-젖었다-말랐다를 되풀이하면서 그 밑에 놓인 손상이 가지 않은 암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광재(slag)를 발생시킨다.

 

203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게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산다.

 

251

사랑과 공부는 한순간도 절대 낭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276쪽

날씨는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언제 겨울이 올지 알려주는 태양은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억겁의 세월 동안 나무들은 경화 과정에 의존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함을 알고 있다.

 

326쪽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알고 있는 일이고, 내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362쪽

자신의 시간에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부여하는 기미가 있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다. 오랫동안 일한 결과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상황을 목격해야 하는 경험은 이 원칙을 시험하는 좋은 사례다. 큰 좌절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잠시 멈추고, 숨을 크게 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집에 가서 그날 저녁은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 후 날이 밝으면 다시 처음부터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즉시 그 문제에 다시 몸을 던쳐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고 바닥까지 다이빙을 해서 그 전날보다 한 시간 더 일하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첫째 방법이 적절함에 이르는 길이라면, 둘째 방법은 중요한 발견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385쪽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 소설가, 페미니스트)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더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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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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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쫙!

그냥 책 2019. 4. 11. 12:28

여기저기서 읽은 내용 가운데 밑줄이라도 쫙 그어 놓고 싶은 글을 모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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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

“출판사의 편집은 … 원고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눈으로 미리 읽어 저자나 필자나 역자의 눈에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안 보였던 원고의 흠을 그들과 의논하여 가려내서, 독자가 참된 뜻에서 ‘편집된’ 책을 읽도록 거드는 일이어야 합니다.”

 

 

 

"느낌으로 통할 일을 외침으로 대신하는 순간 그건 죽는다."

                                                                                      _ 강준만. <특집, 한창기>에서

 

 

"죽은 이를 위한다는 모든 행위는 살아 있는 이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 한 선생을 기린다면서 빚을 갚아 보려는 행위이다."

                                                                                      _ 강운구. <특집, 한창기>에서

 

 

 

또 이어서...

 

 

"필자에게는 언제나 거듭하여 하나마나한 '거대담론'은 지양하고, 현실을 외면한 추상성과 '아리송함'도 배제하고, 이쪽도 저쪽도 '나쁘고' '좋은' 양비론과 양시론도 자제하고, 복잡다단한 현실을 마치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일도양단, 쾌도난마 하지 마시고 유보적 글쓰기를 해달라는 요지의 부탁과 함께 청탁서가 건네졌다."

                                                                                        _ 설호정, <특집, 한창기>에서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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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기획하는 데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데도 큰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또 지금 동네서 아이들과 하는 디베이트에도 적용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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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질문 100가지를 할 수 있으면 책을 쓸 수 있다



강원국의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행복했던 순간 떠올려 보니
연애하며 상대에게 질문이 많았던 때
한국, 질문·반문하기 어려운 구조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질문 잘하는 이 많아야 사회 행복해져


“저 친구 참 삐딱해.”

‘삐딱’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계가 매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퍼즐 조각 맞출 때 아귀가 딱딱 맞아야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채워야 할 공간에 맞는 모양으로 주무르기 쉽게 물컹해야 한다. 고분고분해야 한다. 딱딱하게 모난 돌은 끼워 넣기 힘들다. 어디에 포섭되지 않는다. 묻어가지 않는다. 비탈에서 홀로 서 있다. 눈에 띈다. 아니, 튄다. 결국 정 맞는다. 관계 역시 그러하다. 모난 돌, 내 편이 아닌 돌, 내 말에 순응하지 않는 돌, 물 흐르듯 스며들지 않는 돌은 외톨이가 된다.

인간은 언제 행복한가. 궁금해서 못 견딜 때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꼽으라면 연애 기간이다. 연애 감정이란 실은 궁금증이다. 연애 시절을 떠올려 보라. 사귀는 상대가 나를 좋아할까,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내가 청혼하면 받아줄까. 모든 것이 궁금하다. 데이트하고 헤어지면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그 사람이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그 집 앞으로 달려가고, 그런 시간을 도저히 감당 못 해 결혼한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어떤가. 꼴도 보기 싫지 않던가. 눈앞에서 알짱알짱하지 않는 게 고맙지 않던가. 그때 궁금해지면 병이다. ‘출장 간다고 했는데 정말 갔는지.’ 의심하면 질환이다. 물론 내 얘기는 아니다. 나는 지금도 아내가 그립다. 여전히 궁금하다. 늘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를 웅얼거린다.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가장 궁금한 건 그녀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이다. 그녀가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술상도 치워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한다. 그녀가 지시한 일을 해놓아야 한다. 그래도 그 시간이 가슴 떨리게 무섭고 행복하다.

연애할 때 말고 행복한 시절은 또 있다. 바로 어린 시절이다. 왜 행복한가.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모르는 게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는 모든 게 신기하다. 이것은 무엇인지, 왜 그런지, 오늘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다. 하루하루가 새롭다. 그래서 엄마에게 묻는다. 학교에 가선 선생님께 질문한다. 그것이 본성이다. 왜 알고 싶어 하나. 알아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가야 먹을거리가 있는지, 어딜 가면 위험한지 알아야 살아남는다. 알았을 때 안전하다. 그래서 알고 싶고, 알았을 때 행복하다. 어쩌면 인간의 호기심은 그런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나는 질문 못 하는 사람이다. 최근 어쭙잖게 라디오 진행을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진행자는 청취자 입장에서 궁금한 걸 물어야 한다. 방송국 프로듀서는 나의 연설비서관 경력을 높이 샀다. 대통령 글을 쓰려면 궁금한 걸 대통령께 물어야 하고, 국민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써야 하니 질문 하나는 잘할 것으로 믿고 있다. 착각이다. 나는 받아쓰는 사람이었다. 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통령 말귀를 알아듣고 대통령의 생각을 읽는 사람이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기자들, 질문하는 것이 본업인 기자들도 묻지 않았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가 끝나고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개최국인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 기회를 줬지만, 끝내 질문하지 않았다.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어디 기자뿐인가. 삼성전자, 현대차에 가도, 공무원 조직에 가도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학습이 잘된 결과다. 우리 사회는 궁금해지면 위험하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 주야장천 묻는다. 그러다 혼난다. 특히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엄마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다 한 대 맞는다. “시끄러워. 사람들 많은 데서 그러는 것 아냐!” 학교에 들어가면 더욱 본격화된다. 모르는 것을 물으면 그것도 모르냐고, 무슨 그리 허접한 질문을 하느냐고 타박한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묻는다. 선생님이 ‘질문 있나?’ 하면 모르는 아이들은 묻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묻는다. 학창시절 내내 그랬다. 학교에 왜 가는가. 알려고 가는 것 아닌가. 알려면 모르는 건 물어야 하지 않는가. 질문은 학교 가는 이유이고 학생의 권리 아닌가.

이스라엘에 간 적이 있다.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선생님이 상담한다고 한다.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그런 친구는 아예 모르거나 학습 의욕이 없기 때문인데, 학생에게 이보다 더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0.2%도 안 되는 인구로 25% 가까운 노벨상을 휩쓰는 이유가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하브루타’ 학습과 당돌하고 뻔뻔하게 묻는 ‘후츠파’ 정신에 있다고 한다.

모르는 것을 들킬 때만 위험한 게 아니다. ‘그게 맞나?’ ‘저래도 되나?’ 의문이 들 때도 위험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참고서를 소개했다. 우리 반 친구 중에 누군가 물었다. “선생님, 그 책 사라는 말씀이신가요?” “이리 나와. 누굴 책장사로 알아?” 그 친구 한 시간 내내 맞았다. 학교뿐 아니다. 직장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면 안 된다. 상사 생각에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는 사람은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이 된다. 대차게 끄덕여야 한다. 리액션이 좋아야 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기에 그렇게 고명한 생각을 하실 수 있느냐’고 감탄을 금치 못해야 한다. 당신의 말씀 단 한 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로 받아 적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우아하게 차려입고 청와대 상춘재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대통령 옆에 포진해 있는 기자는 어찌 그리 리액션이 좋은지. 대통령은 착각했을 법도 하다. 기자들 반응으로 봐선 모든 게 완벽하게 해명됐다고. 이뿐인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종범실록’은 또 어떤가. 대법원장을 옥에 가두는 결정적 증거도 깨알같이 받아쓴 수첩이었다지 않은가.

받아 적는 게 장땡이다. 밑줄 쫙쫙 긋고 번호 매기고 별표치고 ‘야마’ 잘 잡고 상사 의중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분위기와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묻는 건 하수다. 행간을 읽고 빈칸을 채워줘야 중수는 되고, 시키지 않은 짓도 잘해야 고수다. 그래야 출세한다.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이유도 질문하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글쓰기는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였지?’ ‘누구였더라?’ ‘이것에 관한 내 생각은 뭐지?’ 물을 수 있으면 쓸 수 있다.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는 내가 아는 것,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게 아니다. 상사가 궁금해하는 것, 알고 싶어 하는 것에 답하는 것이다. 하물며 일기도 ‘오늘 내가 뭘 했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이명박 당선인이 정부 조직개편안을 발표하자, 쉰한 가지 질문으로만 연설문을 작성했다. 첫 문장을 질문으로 시작해보라. 마무리로 질문을 던지며 끝내보라. 질문 100가지를 할 수 있으면 책을 쓸 수 있다. 답을 몰라 못 쓰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못 해 못 쓰는 것이다.

대답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도 잘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받아 적는 사람이 아니라 의문을 품고 반문하는 사람,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문제의식을 갖고 이의 제기하는 사람, 문제를 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 내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더 도약하고 구성원 역시 행복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따로 있다고요?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강원국(작가)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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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그냥 책 2017. 9. 12. 17:14

<불교가 좋다>(가와이 하야오, 니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읽으면서 밑줄 쫙!

처음부터 밑줄 쫙 그을 것을 후반부에서 시작을 한다. 한 번 더 읽으면서 앞 부분은 밑줄을 긋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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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자성(無自性)  

  본래의 '나'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모든 관계의 총화에 의해 규정된다. (중략)

  A의 존립에 B와 C와 D를 비롯한 전부가 관련되어 있는 전체와의 관련성을 무시해서는 어떤 물질의 존재

  도 생각할 수 없지요. 근대과학에서는 하나하나의 개체를 우선시합니다. '개체'를 명확히 하고 '개체'와 '개

  체'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해하려 하지요. 게다가 '개체'를 전부 인과관계에 의해 이해하려고 합니다.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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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 앞날을 비롯해 요즘 청소년이나 청년, 심지어 나. 아니, 우리 앞날을 고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뭘 하며 살아야 할까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다가올 미래는 낙관만 하기에는 좀 그렇기에... 대개 젊은이들에게 열정을 불태울 일을 찾아가라고 덤으로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쉽게들 말하곤 한다. 

개뻥!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친구들보다 10년 늦게 졸업(아니, 떼려쳤다)하고 사회 생활도 그러했다. 그때 고민을 하길, 보통의 행로로 사회에 나가서 뭘 하기에는 벌써 늦었으니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찾으려 한 것 같다. 학창시절 운동을 했으니 거기에서 생긴 가치관, 삶의 방식 등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그런 사회적인 가치 공동체적 가치를 조금이나마 실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타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일을 좇다 보면 자신도 어느새 바뀌어 있을 거라고 본다. 타인의 삶만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위험할 수도 있다. 암튼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모아보고 정리해 보는 일도 의미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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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보다는 타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일을 좇아야 합니다

2015년 7월 13일  |  By:   |  칼럼  |  6개의 댓글

일반적인 사람은 인생의 1/3 이상을 직장에서 보냅니다. 따라서 가치 있고 보람찬 진로를 선택하는 것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건강한 사회와 경제를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들을 대상으로 한 진로 상담은 여전히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실체를 알기 힘든 열정만을 따르라고 강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일반적으로 진로 선택에 대한 두 가지 조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높은 연봉’, 둘째는 ‘열정을 가질 수 있는 분야’입니다. 열정을 가질 수 있으면서 물질적인 보상까지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라는 의미이죠.

하지만 이러한 조언의 문제는 대부분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 자신들이 큰 열정을 느끼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운 좋게 열정이 느껴지는 분야가 있다고 할지라도 미래에도 이러한 열정이 지속할 수 있을지 쉽게 장담하기 힘들죠. 게다가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하거나 탐색한다고 해서 쉽게 열정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은 열정이 우리의 마음속 어딘 가에 이미 가공된 상태로 잠재하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열정은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기 보다 의미 있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점점 발달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청년 시절 스티브 잡스를 사로잡은 것은 컴퓨터가 아니라 오히려 불교였죠.

와튼 스쿨의 아담 그랜트(Adam Grant) 교수는 의미 없는 직업의 공통점은 타인의 삶에 아무런 이바지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연구는 본인이 수행하는 일이 자신보다 타인의 삶에 크게 이바지할 경우 일에 대한 만족도가 훨씬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타인을 돕는 데서 느끼는 행복이 자신을 위한 일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훨씬 오래도록 지속된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기도 했죠.

현실적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열정을 느끼는 분야에서만 일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구성원 모두가 각자 어느 분야에서 열정을 느끼는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타인의 삶에 이바지하는 삶은 모두가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행복은 직업에 대한 만족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무작정 열정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타인의 삶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Quartz)

원문보기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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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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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퍼민트에서 가져옴(바로가기)


[책]지식의 착각: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이유

The Knowledge Illusion: Why We Never Think Alone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의 상징과도 같은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은 홀로 바닥을 쳐다보며 손에 턱을 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착각: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이유(The Knowledge Illusion: Why We Never Think Alone)”의 저자들은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브라운 대학의 스티븐 슬로먼과 콜로라도 대학 리즈 경영대학원의 필립 펀바흐는 우리의 지적 능력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물건에 의존하며, 단지 우리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지식을 공동체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래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가레쓰 쿡과 슬로먼의 대화입니다.


Q: 당신은 우리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뜻인가요?

A: 사람들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가진 이해의 깊이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 실험 중에는 이를 직접 증명한 다양한 실험들이 있습니다. 예일의 위대한 심리학자인 프랭크 카일과 그의 학생들은 오늘날 지식의 착각(knowledge illusion)이라 부르는 현상, 곧 사람들이 자신의 설명 능력에 가지는 착각을 처음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퍼, 화장실, 볼펜 등의 여러 대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자신이 7점 척도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카일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 작동방식을 물었을때 사람들의 답은 형편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가장 간단한 물건의 작동 방식조차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다시 그들의 이해 정도를 묻자 그 값은 크게 낮아졌습니다. 그들은 직접 설명을 해보고 나서야 자신이 가진 착각을 깨우친 것입니다. 우리는 물건만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 처럼 대상을 바꿔가며 실험해 보았고,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착각은 반복해서 발견되었습니다. 심리학자 매튜 피셔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믿음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능력 또한 실제보다 과신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간접적인 증거 중에는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인의 약 50%는 항생제가 바이러스가 아니라 미생물을 죽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대법관의 이름을 한 명이라도 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레베카 로손은 사람들이 충분한 도움을 받더라도 자전거를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 크게 놀랍니다.

Q: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네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A: 인간의 추론은 몇 가지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리는 대부분의 결론은 직관에 의한 것입니다. 직관의 특징은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우리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관이 내리는 결론만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직관은 기억에 저장된 결론을 바로 가지고 옵니다. 우리는 기억에서 정보를 꺼내는 과정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결론만이 의식에 전달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대부분은 18세기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 대부분은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억에서 사실을 꺼내올 뿐입니다. 자신의 기억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 사실을 제대로 정당화할 수 없으며, 사실 기억에서 어떻게 이 정보를 꺼내오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마음에 이 사실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물론 직관은 기억보다 조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직관은 고도로 정교한 패턴 인식이 가능합니다. 만약 나에게 프랑스 혁명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상당히 피상적이고 정말로 중요한 많은 사실을 놓치겠지만, 크게보면 대체로 맞는 이야기일 것이고 이는 내가 가진 직관 시스템이 합리적인 세상의 작동방식을 포함할 정도로 정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그 때 프랑스 왕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목이 잘리기 전에 사람들에게 잡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는 그를 먼저 잡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목이 잘렸다는 것은 내 추측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목이 잘렸다는 것을 역시 기억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즉, 직관은 정말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측면에서는 큰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인지과학자 토마스 란다우어는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오늘날 USB 드라이브보다 작은 1기가바이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직관보다 더 강력한, 어떤 것을 곰곰히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는 숙고(deliberating)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자주 하지 않으며, 특히 혼자서는 이를 잘하지 못합니다. 즉, 이를 잘하기 위해 여러가지 도움을 필요로합니다. 우리는 칠판이나 컴퓨터와 같은 도움이 되는 도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깊은 생각은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과학자들이 실험실 미팅을 하고 의사들이 전문의와 상담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누군가 분노하거나 혼란에 빠졌을 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개인은 자신의 믿음을 혼자서는 정당화하지 못하는 반면, 집단은 무언가를 정당화하는데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정당화가 꼭 철학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이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지가 커다란 확신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Q: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우선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알아야 하는 자신 중에 자신의 지적 능력 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게다가 우리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무지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며 지식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큰 존경과 감사를 가지게 할 것입니다. 이는 직장이든 가정이든 어느 곳에서난 매우 중요한 인간관계의 원칙입니다. 사회를 더 정의롭고 평화롭게 만드는데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Q: 우리의 지식이 “사회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시죠.

A: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지식과 그렇지 않은 지식,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머리에 있는 지식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지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을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느냐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지식은 공동체안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식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생각은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거시적 관점에서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의 기본적 가치와 믿음을 정의하는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자아가 문화 공동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미시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고난 협력자이며 지적인 팀 플레이어입니다. 우리는 공동으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 능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과 협력해 문제를 생각합니다.

개인이 정보를 처리하는 합리적인 주체가 되기는 힘듭니다. 사람들은 보통 공동체를 통해 정보를 처리합니다.

Q: 인간이 “지적 팀 플레이어”라는 것은 어떤 뜻인가요?

A: 숙고하는 상태(deliberative mind)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기위해 진화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길을 건널 때 우리는 운전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추측해야하며 서로 같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위해 눈빛을 교환하기도 합니다. 이런 종류의 지적 협력은 스포츠나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의 농담, 자동차 수리, 혹은 유전자 분석과 같은 모든 집단 활동에서 발견됩니다. 인간은 함께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직관을 자극하며 서로의 생각을 완성시키고 다른 이가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지적 노동의 분업이 있습니다.

어떤 인지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이런 종류의 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자 유일한 지적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목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동물들에게서 발견되는 사냥을 위해 힘을 합치는 수준의 협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보다 일반적인 목표를 위해 협력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와 부모가 같이 모래성을 쌓을 때 그들은 말 그대로 생각을 공유합니다. 날씨나 썰물과 밀물(모래성이 바닷가에 있다면), 도구의 활용 등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 명에게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이 돕습니다. 이는 서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종류의 지적 상태의 공유는 인간에게 매우 흔히 발견되며, 우리의 가장 가까운 유전적 친척인 침팬지보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이 여기에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이는 기발한 실험들이 있습니다.

Q: 첨단 기술은 인간의 이런 특징과 어떤 관계를 가지나요?

A: 여러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우선 기술은 강력한 정보의 창고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지식의 착각을 강화시킵니다. 심리학자 아드리안 워드와 동료들이 행한 실험에서 사람들은 구글 검색을 사용할 수 있을때 자신들이 더 영리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글을 사용할 수 있을때 영리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보의 천국입니다. 아마 우리의 지식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일원일 것입니다. 하지만 구글은 인간이 가진 결정적인 능력인 목적을 공유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인간과는 다른 역할을 합니다. 구글은 우리의 마음을 읽고 우리가 무엇을 찾는지 알아내지 못합니다. 때로 영리한 프로그래머가 어떤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인간을 잘 흉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리함은 인간 프로그래머의 영리함이지 기계의 영리함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GPS 네비게이션은 종종 운전자를 잘못된 길로 보내며 호수 속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술을 인간을 대할 때처럼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로 착각한다면 큰 재난을 맞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항상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가진 가장 무서운 점은 기술이 우리의 사회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운 상황입니다. 또한 우리가 과거에 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을 추천해 줍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정보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 살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생긴 현실을 우리는 지금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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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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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었다.

무엇보다 언어 또는 낱말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고, 그런 생각을 바탕에 둔 듯한 소설 속 연인들의 대화 또한 관계 맺기를 다시금 돌아보게 해주는 듯도 했다.

그림자가 주는 느낌도 독특하고 신선했다. 우리는 저마다의 그림자를 안고, 아니 짊어지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뒷부분에 평론가가 쓴 글은 두루뭉술하게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느낌을 또렷하게 정리해주는 듯하여 부분부분 끄적여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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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_ 자명성의 해체

사람들이 말과 글에서 현실이라는 단어를 무신경하게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 그 말과 글은 현실과 차갑게 무관해진다. 현실과 직면하지 않기 위해 현실이라는 말이 필요했다는 듯이 말이다. 문학의 할 일 중 하나는 우리가 현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명함에 관한 그 잘못된 믿음을 해체하는 일이다.

 

2. 환상_ 불행의 단독성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진다. 앞에서 소설가들은 현실이라는 개념의 자명성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소설가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중략)

그러니 이 작가의 환상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라면 상투적인 표현만큼이나 지나치게 유려한 표현도 때로는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결벽증이 낳은 자구책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3. 언어_ 일반화의 폭력

여러분도 이런 신기한 사실을 영락없이 관찰하셨겠지요? 즉 여러분이 예사 말투에서 듣거나 쓸 때는 완전히 분명한 어떤 낱말이, 또 여느 글귀의 빠른 진행 속에 끼여 있을 때는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 낱말이, 그것을 따로 살펴보려고 순환 과정에서 끌어내자마자, 그 일시적 기능에서 벗어나게 한 다음 하나의 뜻을 찾아 주려 들자마자, 마술과도 같이 거추장스러워지고 야릇한 저항을 끌어들여 뜻 매기려는 노력 모두를 좌절시켜 버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폴 발레리, <시와 추상적 사유>에서

 

모든 낱말들에는 때가 묻어 있다는 것, 그래서 시인이라면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런즉 언어 상황의 청소가 먼저 이루어져야 겨우 한 낱말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인용문의 취지다.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언어와 서먹해지는 순간을 겪는다는 것인데, 시인이 아닌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이와 같은 기묘한 체험을 가끔씩 하곤 한다.

 

4. 대화_ 윤리적인 무지

언어의 이런 폭력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중략) 블랑쇼는 글쓰기에서 언어가 근복전으로 세계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깊은 회의를 느꼈지만 말하기의 경우, 혹은 최소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경우는 사정이 다를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미지의 상대화 관계 맺기를 원한다면 유지해야만 하는 환원할 수 없는 거리는 말하기의 특별한 선물이다."

(중략)

A는 B일까요? 음, 아닐까요? 그렇죠, 역시 그런 것일까요?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대화가 조금 이상해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왜일까, 대화들에 응당 개입하곤 하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 아닌지, 여기에는 독단적인 판단이 없고 그 판단의 강요가 없으며 효율을 위한 과속이 없다. 그 대신 어떤 윤리적인 '거리'가 있다.(중략) 지금까지 우리가 현실의 자명성, 불행의 평범성, 언어의 일반성 등으로 규정해 온 어떤 요소들을 대화 안에 들여놓지 앟기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윤리적인 무지'의 대화라고 부르고 싶다. 세속적인 이해타산에 너무나 밝은 우리들의 대화는 똑똑하게 슬프고, 그런 것들에 무지한 이 인물들의 윤리적인 대화는 어쩐지 무의미해 보이면서 아름답다.


5. 사랑_ 연인들의 공동체

사랑이란 무언잇가, 연인의 가마 모양을 유심히 보면서(34쪽) 그를 유일무이한 단독자로 발견해 내는 일이고, 설사 내가 쇄골이 반듯한 사람을 좋아하더라도 쇄골이 반듯하지 않은 연인에게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39쪽)라고 말해 주면서 그 단독성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절대화하는 일이다. (중략) 블랑쇼는 "연인들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에 있다."(<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고 말한 적이 있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훌륭한 연애소설은 그 자체로 억압적인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서사라고 말해도 좋을 것인데,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간접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충분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두 연인이 보여 주는 어떤 윤리적인 관계의 가능성을 통해 시스템의 비윤리적인 비정함에 항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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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보다 더 오래 남는 문장도 상징도 대화도 없는 그런 일회용 소설들, 그러나 이 작품은 다시 읽기를 유도하고 또 견뎌 낸다.이 소설의 문장들은 삶의 터전 바깥으로 비틀비틀 끌려 나가는 사람의 속도로 걸어가고, 이 소설의 상징들은 절반쯤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처럼 처연하게 흔들리며, 이 소설의 대화들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가장 진실해질 때의 그 표정으로 오고 간다. 그런 것들이 절규도 환희도 없이, 훈계도 산파도 없이......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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