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1+1=1이어야 한다는 착각에 많이들 빠져 있다. 빠져나오지 않는 한 갈등뿐이라고 본다. 

성평등이나 민주주의가 확장될 수록 결혼 제도는 많이 바뀌지 않을까 싶다. 아주 많이!

바뀌어야지. 

사회를 구성할 존재가 되는 아이 돌봄을 가족(가정) 또는 부부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사실 야비해 보인다. 사회가 책임져 줘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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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Marriage



며칠 전 뉴욕에서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돌아보며 물었다. "실례지만 버트런드 러셀 씨 아니세요?"


부인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내 강의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건 지적이었던 옛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은 유부남이다 보니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살죠."


나는 결혼 생활의 안타까운 결과를 보는 듯싶어 자연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인격의 실현이어야 마땅할 결혼을 왜 정반대로 느껴야 하는 걸까? 택시 기사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는 단서는 없었다. 그가 이 비참한 결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결혼 그 자체였다. 나 자신은 결혼함으로써 그런 결과를 경험했던 적은 없지만 그 택시 기사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바를 털어놓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경제 탓이고 부분적으로는 사회적인 관습 탓이다. 후자가 좀 더 쉽게 정리되므로 그것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남편과 아내가 여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건 나쁜 관습이다. 그 택시 기사의 아내가 강연 따위를 좋아할 리 없고, 남편이 자기를 버려두고 혼자 강연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리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배우자가 원하리라 짐작되는 즐거움을 경계하다가 자기 자신의 즐거움마저 포기하고 사는 남편과 아내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에 반감을 갖는 것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소한 이기주의보다 훨씬 더 해롭다. 따라서 부부가 함께 지루해지고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한다면 남편과 아내가 어느 정도는 각자의 사회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측면에서는 한결 괜찮은 관습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이다. 미혼 남성은 자신의 소득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기혼 남성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물론 대다수 미혼 남성이 아내를 물색하는 행위를 포함해 한낱 오락거리에 여가를 바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폐와 동전의 보상이 전혀 없는 종류의 교육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일정 비율 있다. 이런 남성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의 여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또 설령 여가가 나더라도 여윳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성의 경우, 특히 이른바 '지적인' 여성들이 결혼해서 느끼는 상실감은 아이 없이 살지 않는 한, 남성보다 훨씬 더 크다. 결국 남녀 모두가 결혼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고충은 국가가 육아 비용 전액을 맡아주지 않는 한, 아니 맡아주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치유될 수 없는데, 우리 시대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성싶지 않다. 그러나 육아 부분에서 과거에는 보편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흔한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현명한 태도를 취한다면 이 고충을 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육아는 엄청난 기술과 과학을 요구하는 동시에 대단히 흥미로운 관찰의 영역을 제공하기도 한다. 기술과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애정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애정을 보완할 수는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잘못 이해할 경우 본래 의도했던 바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이 유년기의 과학적 성질을 이해하게 되면 가족생활이라는 주제에서 지식인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현상도 줄어들 것이라고 본다.


아는 게 많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는 사람보다는 무지하지만 애정이 있는 사람이 아이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경우보다는 제대로 알면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낫다. (1931. 11. 13.)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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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삶에서 떨어져 있는 무엇으로 여기기 쉽다. 그런 식으로 유혹하는 무리들이 설치기도 하고.

살아가는 힘을 주는 명상이 필요하고, 그런 명상을 볼 줄 아는 눈도 필요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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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 사라진 시대

The Decay of Meditation



100년 전에는, 그리고 150년 전에는 더욱더 그랬는데, 부유한 사람들이 지금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확실히 좀 더 교양이 풍부했다. 그 시절 부자는 당연히 라틴시를 인용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품평하고 고전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대개 자기 나라의 문학과 (프랑스인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문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박식함을 교수들에게서나, 게다가 분야별로만 기대할 수 있다. 이 교수는 라틴어를 알고 저 교수는 옛날의 대가들을 안다. 또 음악을 아는 교수가 있고, 그 와중에도 현대문학의 가장 쓸데없는 지식까지 아는 교수도 있다. 부자들은 그런 지식을 갖춘다는 걸 체면이 깎이는 일로 생각할 것이며, 무지는 사회적 지위의 보증서가 되어왔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홉 뮤즈들의 이름이나 황도 12궁의 별자리를 알아야만 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어린 시절 이 모두를 배웠고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현대 세계에는 여가라고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옛날보다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오락도 일처럼 수고로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씩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쟁 방지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절박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고민하지 않아도 상황이 저절로 해결되리라 기대하면서 어깨만 한 번 들썩하고는 깨끗이 잊어버린다. 그러나 손 놓고 있어도 상황이 그렇게 친절하게 전개될 리는 없다.


이런 결과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절약하는 장치들 때문에 초래됐다. 한 예로 이동이란 문제를 살펴보자. 여행 속도가 빨라질수록 여행에 들어가는 시간도 많아진다. 요즘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집에서 한 시간 걸리는 사무실까지 간다.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같은 얘기가 적용된다. 예전에는 자신의 말이 심하게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이웃들을 방문했지만 지금은 100마일 이내라면 어디든 방문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전화에 대해 따져 보자. 언젠가 귀가 어두운 노신사가 전화를 걸어와 장거리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네, 버트런드 러셀입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나는 좀 더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지만 노신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요?" 마침내 내가 허파가 터져나갈 정도로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알아듣고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 그건 알고 있었소." 대화를 더 나눌 시간은 없었다. 전화, 참 유용한 발명품이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쌓여 바쁜 하루하루를 채우면서 마치 일이 마무리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완전히 허구다. 퀘이커 교도들은 대다수 현대인들보다는 좀 더 지혜로운데, 내 생각에는 그들이 수행하는 침묵의 명상 덕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우리가 매일 30분씩만 말없이 부동자세로 있을 수 있다면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모든 사안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맑은 정신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휴전 기념일(제1차 세계대전 휴전을 기념하는 11월 11일)에 단 2분만이 침묵에 할애되고 한 해의 나머지 모든 시간이 대체로 무익한 소란에 바쳐진다. 참으로 부당한 비율이 아닐 수 없다. 침묵이 좀 더 길어지면 무익한 소란도 좀 더 줄어들 텐데 말이다. (1931. 11. 4.)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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