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이라는 잡지에 실린 한상봉 샘 글.

우리는 여성만 '소비'해 온 게 아닐게다.

그럴싸한 멋진 말이나 주장, 이론 등을 그저 '소비'하기만 했으리라 본다.

나도 마친가지고. 소비하지 않고 소화를 했다면, 그러한 말이나 주장, 이론 들이 

나를 들여다보고 성찰하고, 한꺼풀 거듭나는 삶이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우리 일상 대부분이 '소비'의 영역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듯하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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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여성을 소비하는 교회수원 교구 사제 성추행 사건을 바라보며






[한상봉 칼럼]


평소 도로시데이를 흠모하던 차에, 그분이 가장 즐겨 읽던 소설이 러시아문학이라는 글을 접하고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다시 읽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겉사람 뿐 아니라 속사람도 알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이참에 며칠 전 ‘여성’에 대한 남성의 몰이해에 대한 핀잔을 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 ‘하루에 책 한 권 읽기’에 돌입한 어느 여자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남자들이 쓴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 짜증난다. 여자들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였다.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톨스토이가 쉰 줄에 들어서 회심한 뒤로 아내와 심각한 갈등을 빚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백작이었던 톨스토이가 귀족생활을 청산하고자 하나, 아내는 내내 누려왔던 생활을 버릴 수 없었고, 결국 남편의 눈 밖에 나서 죽어서도 곁에 묻히지 못했다. 톨스토이에게 여자란 ‘안나 카레리나’처럼 본능에 충실한 천박한 족속에 지나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죄와 벌>의 소냐처럼 창녀지만 성자였던 여성이 없는 게 아니지만, 그가 심리적 천재를 발휘한 사람들은 라스콜리니코프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남자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의 천재가 여성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사실상 남자 사람이 주류를 형성한 문학세계에서 여성은 항상 ‘주변인’이거나, 상상 속의 여성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포함해 남자 사람들이여, ‘인간’을 알고 싶으면 여성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어라. 그들은 어쩌면 남자 사람들보다 훨씬 ‘개성화’된, 좀더 진화된 사람들일 공산이 크다. 잘 나가는 유명 작가 중에 남자들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정작 책을 읽고 사색하는 대다수는 여성일지니. 내가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 알았다. 도로시 데이와 시몬 베유.


특별히 남성들이 주류를 형성하는 교회에서 여성은 ‘사람’일 수 없다.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거나, 아니면 성모 마리아처럼 ‘상상 안에서만 고결한 사람’이기 쉽다. 실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쉽게 소비된다. 여성들의 발언은 ‘위경(僞經)’이거나 참고사항이 될지언정 진지한 ‘정경(正經)’에 포함되지 않는다. 예수를 증언한 4대 복음서 가운데 여성의 이름이 오르지 못하는 까닭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를 가장 사랑했고, 그분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여인이지만,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교회에서 그(녀)들을 위한 자리는 없거나 없어졌다.

 

사진출처=pixabay.com

여성 평신도, 착한 신자 또는 소비재


이런 생각들이 들끓는 가운데, 주일 아침에 들려온 소식은 먼저 “터질 게 터졌구나”였고, 피해 여성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 역사 안에서 줄곧 침묵을 강요당하며 소비되어 왔던 여성’이라는 집단적 의미로 다가왔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일원이면서, 얼핏 보기에 사람 좋게 생긴 그 사제도 엉겁결에 교회역사 안에서 희생당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발생한 그 성추행 사건을 한 사제의 개인적 일탈로 본다면 오산이다. 예전에도 많았고, 지금도 ‘사실상’ 많고, 앞으로도 비일비재할 교회 성추행 사건의 틈새가 김밥 옆구리 터지듯 세간(世間)에 잠시 비어져 나온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지금 당장은 미투(Me Too)운동 차원에서 격렬하게 논란이 되고 있으며, 지난 9년 동안 보수정권에 빌붙어 먹던 언론이 ‘선정적 기사’라는 호재를 만나 먼지털이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문제는 수원교구에서 그 사제에게 ‘정직’을 먹이느냐, ‘면직’을 먹이느냐가 본질은 아니다. 이 사제의 스캔들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이다. 본인의 입으로 고백했듯이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를 해 달라.”는 말은 절박해 보이고, 단순히 수양부족으로 돌리기에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사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상대 여성이 때로는 ‘착한 신자’로 보이다가, 때로는 “내 필요에 응답하는 (단순한, 의식 없는, 존중하며 상대의 의사를 물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닌) 소비재”로 보이는 까닭이다.


다소 스펙트럼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에서 올라오는 욕구를 참느냐, 행동으로 드러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에 대한 사제들의 인식은 그다지 인격적이지 않은 게 문제다. 남성 사제 중심의 교회는 ‘교회의 주류인 여성 평신도’에 대하여 무지할 뿐 아니라, 사실상 그다지 관심도 없고, 관심이 있다면 여성이 혐오할만한 대상으로 떠오를 때뿐이다. 그래서 본당에서도 여성 신자들은 ‘배려 없이’ 지칠 때까지 마구 소비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제들의 성추행 배후에는 교회가 있다


사제들에게 여성 신자는 두 종류다. (복음서의 진짜 의미와 상관없이)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존경의 눈초리로 사제의 얼굴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팬클럽이거나 본당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마르타들뿐이다. 마리아들은 사제에게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허위의식을 지니게 하고, 마르타들은 사제들의 수족처럼 움직인다. ‘영혼이 없는’ 그들에게는 당연히 사목적 결정권이 없으며, 사제는 그들의 머리이며, 동시에 심장처럼 행동한다. 사제가 살면 너희도 살고, 사제가 죽으면 너희도 죽는다는 논리가 대세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결국 이번 성추행 사건의 배후는 ‘사실상’ 교회다. 사제들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가부장 문화이다. 여성과 관련된 스캔들이 발생할 때마다 교회가 취하는 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시쳇말로 “여자문제는 참아도 돈 문제는 못 참는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사제가 특정 여성과 관계를 맺었을 때, 교구에서는 통상 “사제도 남잔데 그럴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 문제로 횡령 등 교회재산에 피해를 입혔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쩌다 보니 특정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는데, 하느님도 ‘사랑 그 자체’라고 가르치는 마당에 문제 삼기 어렵다. 교회법보다 상위법이 사랑의 법칙 아닌가? 이웃사랑 하겠다는데 무엇이라 말할까? 그러나, 성추행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이다. 문제는 사제들이 여성에 대해서는 유독 사랑과 폭력을 자주 헛갈린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여성 그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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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실패한 남성, 또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2018년을 살고 있지만, 여성에 대한 인식은 성직자들의 복식과 언어만큼이나 중세(中世)를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오로지 남성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까닭에 신성한 사제직분은 남성들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둔스 스코투스는 여성은 인류를 타락하게 만든 하와의 후계자이므로 인간의 구원을 담당하는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여성은 남성과 비교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라는 게 교회의 전통적 생각이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허약하게 태어나며 이성과 미덕과 기강 면에서 떨어지며 불안정하고 변덕스럽고 쉽사리 격정에 빠져들고 자신과 타인을 통제하는 능력이 뒤진다는 것이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심지어 여자는 “악마가 들어오는 통로”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는 수태의 형식요소가 남성씨앗인데, 자궁의 토양이 불결한 경우에 어머니를 닮은 남성을 낳거나 아버지를 닮은 여성을 낳거나 또는 어머니를 닮은 여성을 낳는다고 보았다. 즉, 여성은 수태될 당시에 이미 ‘실패한 남성’이거나 하나의 ‘기형’이라는 것이다. 비록 <여성의 존엄> 등 교황들의 변화된 여성관을 담은 문서들이 발표되어도, ‘독신’ 남성 사제들이 중심이 된 교회에서 여성들은 끝없이 경계해야 할 대상이며,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들을 교회의 ‘정상적인 사목적 파트너’로 인식할 수 없는 현실은 여성을 은연중에 ‘물건’처럼 취급하며,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소비의 대상’으로 만든다.


사제가 원하지 않는데도 달겨드는 여성이 있다면 ‘미친 년’이고, 사제가 원할 때 수용하는 여성은 사제들 욕망의 ‘착한 배설구’가 된다. 교회는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의 사각지대이다. 상징적으로는 ‘여성사제 불가 원칙’이 보여주는 가부장적 교회구조가 그러하고, 독신서원을 통해 ‘여성성’을 상징적으로 버린 ‘독신자 여성 수도자’에 대한 우대정책이 그러하다. 교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비롯된 하와만 기억할 뿐,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동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는 기억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여성과 남성을 사랑하신다. 독신자뿐 아니라 유부남 유부녀도 사랑하신다.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신다. 이걸 믿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가부장권을 강박하는 나머지 생각은 역사적으로 끼어든 우상숭배의 결과라도 보아도 좋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복음서에서 남성 제자들은 수없이 예수의 질책을 받지만, 예수는 단 한 번도 여성을 꾸짖거나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지금은 사순절이다. 그 엄혹한 성주간에 남성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 앞에서 자리다툼을 벌이지만, 정작 예수 죽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람은 여성이었다. 누가 역차별적 발언이라 부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복음서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예수에게, 그분이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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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에 이번 사제 성추행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 관해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1. 피해 여성의 고백에 지지와 감사를 드린다. 그분의 고백은 참 겸손하고 아름답다. 가족들의지지 역시 그분 가정이 얼마나 튼튼한 신앙에 뿌리를 대고 있는 공동체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이분들의 용기가 교회에 뿌리내려 있는 어두운 가부장적 편견과 도착된 성의식, 일그러진 교회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교회는 자신의 병고를 알면서도 마취제로 처방해 왔지만, 아무래도 수술대로 가야할 지도 모른다. 아픔이 클수록 성장하는 법이다. 이 말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 이번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정의구현사제단에 직접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사제단은 자발적인 결사체로서, 사과문을 통해 “한 모 신부는 엄연히 사제단의 일원이며 형제이므로 그의 죄는 고스란히 사제단의 죄”라고 고백한 것은 도의적으로 필요하지만, 사제단 활동 중에 발생한 사건도 아닌 마당에, 이 문제는 사제단의 죄가 아니라, 사제들의 허물이며, 교회의 책임이다.


3. 성추행 당사자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개인적 친분도 없고, 저간의 사정에 대한 내막을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제직을 목숨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점과,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사제는 서품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며, 그리스도인 역시 세례로 완성되는 게 아님을 확인할 뿐이다.


4. 이 사건이 드러나자, 즉각적으로 수원교구에서 해당 사제에 대한 ‘정직’ 처분을 내리고, 교구장 주교가 특별사목서한을 통해 “공동 연대 책임을 지고 함께 회개하며, 올바른 사제상을 재정립하고 사제단의 쇄신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힌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게 공영방송의 힘인지, 이런 문제에 특별히 민감하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문제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제 성추행 사건들이다. 피해 여성은 ‘전수조사’를 요청했는데, 교회를 위해서도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해당 사제를 ‘정직’이 아니라 ‘면직’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면직이란 아예 신부 옷을 벗기자는 요구인데, 자칫 ‘해당 사제에 대한 혐오 또는 증오’가 배어 있는 발언은 아닌지 찬찬히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제직무수행과 관련해 교구의 현명한 판단이 뒤따르기를 기대한다. 마녀화형보다 마녀가 출몰하는 이유를 먼저 살펴야 한다. 해당 사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필요하지만, 일벌백계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폄하적, 여성을 사물처럼 대상화하는 교회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형무소(刑務所)가 아니라 교도소(矯導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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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동안 교회는 자신을 세상보다 우월한 ‘완전한 사회’라고 믿어왔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사’로서 가르쳐 왔다. 한국사회를 두고도 정의와 평화, 공동선과 민주주의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교회 자신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다. 마치 교회는 정의와 평화, 공동선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서 면제받은 ‘성역’처럼. 그 성역이 무너지고 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복음은 양날을 가진 검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면 할수록 “과연 우리는 복음적인지” 더 끈질기고 명료하게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긴 글을 쓰고도 허망한 느낌은 왜인가? 나도 평신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당 사목위원으로서, 신학활동가로서 교회의 일부분인데, 이 모든 이야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스스로 묻고 있는 까닭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Posted by 익은수박
,

깊이 고민하게 해주는 글.

2014년 기사임에도 어쩌다 내게 와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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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마저 상품이 된 시대, 혁명은 없다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 ‘나눔경제담론에 반박하다

 

이번주 방한한 <한계비용 제로사회>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을 비롯해, 소유보다는 점유를 지향하는 나눔 경제또는 협력적 (공동체) 공유경제가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담론이 최근 번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실현 불가능하며 오히려 전면적인 상품화·자본화를 재촉할뿐이라는 반박 또한 나오고 있다. 최근 유럽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의 글이 대표적이다.

 

한 교수는 지난 92일치 독일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에 실은 기고 오늘날 왜 혁명은 불가능한가?’에서, 신자유주의체제 아래에서 친절과 베풂도 더 나은 평점을 얻기 위한 상품화논리에 함몰당한다며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시점에 완벽해진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 이것이 혁명이 맞이할 종말이라고 썼다.

 

그는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유혹을 통해 대중을 통제하는 지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제국>의 공저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한 혁명적 저항 주체로서의 다중(멀티튜드) 개념 같은 것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기고는 지금까지 18000여 개의 추천과 1000개가 넘는 리트위트를 기록하며, 스페인 <엘파이스>(103일치)에도 번역 게재됐다.

 

어째서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그토록 안정적인가? 어째서 이에 맞서는 저항들이 그토록 적은가? 어째서 이 저항들은 모두 그토록 빨리 수포로 끝나고 마는가? 어째서 점점 더 커지는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가?”

 

한 교수는 이런 질문의 답이 신자유주의체제 권력과 지배 작동방식에 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의 선구적 투사 마거릿 대처 정권은 노조를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고 공권력 등 폭력을 동원해 굴복시켰다. 통제된 산업사회에서 권력은 체제 유지를 위해 억압적이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 착취는 저항과 반기로 이어졌다.

 

신자유주의 빈부차 키우지만

권력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

적이 없기에 자신과의 싸움만


혁명 일으킬 군중 없는 상황서

나눔경제는 해방은커녕

우리삶 더 상품화시킬 수도

 

하지만, 지금의 신자유주의에서 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를 경영하는 자유로운 경영자(자기-경영자)가 되기 때문에 저항해야 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다. 계급 투쟁은 자기 스스로와의 내적 싸움으로 변화한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한다. 사회가 아닌 자신을 문제로 여긴다. 큰 힘을 들여가며,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규칙과 금기로 옥죄는 통제적 권력은 비효율적이다. 본질적으로 더 효율적인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배 관계에 종속하게끔 만드는 권력 기술이다.”

 

굴복당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게 만드는 이 효과적인 지배 기술은 저항을 중화한다.

 

그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자본에 대한 저항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에 강요한 신자유주의 체제 탓이며, 한국이 우울증과 소진(번아웃)현상이 만연하고 자살율이 가장 높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자기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외부를 향한 공격은 자신을 향한 공격 앞에 힘을 잃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 하나의 세계적 저항 혁명의 군중으로 일어설 수 있을 만한, 서로 협조하고, 얽혀 있는 다중(멀티튜드)은 없다.” 한 교수는 특히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나눔 경제는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은커녕 오히려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상품화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돈이 없는 사람은 나눔에로 접근도 할 수 없다. 접근의 시대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어 있는 수용소에 살고 있다. 모든 개인 주거공간을 호텔로 바꾸어 주는 커뮤니티 시장 에어비엔비(Airbnb)는 손님에 대한 환대마저도 상업화시킨다. 공동체 또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이념이 공동체를 전부 자본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 서로 평점을 주고 받는 사회에서는 친절함도 상품화된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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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트도이체 차이퉁> ‘오늘날 왜 혁명은 불가능한가?’ 전문

 

일 년 전 베를린에서 안토니오 네그리와 내가 서로 토론을 벌였을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네그리는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라는 제국에 대해 범세계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들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적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나를 회의주의자 교수로 일컬었다. 네그리는 저항적이고 혁명적인 서로 얽혀 있는 대중, 다중(멀티튜드)’을 강조하며 얘기했는데, 그는 분명 이것으로 이 신자유주의라는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에게는 공산주의적 혁명가가 취하는 이러한 입장이 너무나도 순진해 보였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네그리에게 어째서 오늘날 혁명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지 설명하려고 했다.

 

어째서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그토록 안정적인가? 어째서 이에 맞서는 저항들이 그토록 적은가? 어째서 이 저항들은 모두 그토록 빨리 수포로 끝나고 마는가? 어째서 점점 더 커지는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가?

 

이를 설명하려면, 권력과 지배가 오늘날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지배체제를 설치하려는 사람은 저항을 없애야만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에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지배체제를 설치하려면, 눌러앉히는 권력(setzende Macht)이 필요하고 이러한 권력은 자주 폭력을 동반한다. 하지만 눌러앉히는 권력은 체제를 내부로 안정화시키는 권력과 동일하지 않다. 마거릿 대처가 신자유주의의 선구적 투사로서 노조를 내부의 적으로 다루고 폭력적으로 퇴치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신 자유주의 어젠다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적인 개입은 체제를 유지하는 그러한 권력은 아니다.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은 더이상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통제된 산업사회에서 체제를 유지하던 권력은 억압적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 소유주들에 의해 잔인하게 착취를 당했다. 그리하여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착취는 저항과 반기로 이어졌다. 여기서는 지배적인 생산관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혁명이 가능했다. 이 억압적인 체제에서는 억압도 눈에 보이고, 억압을 하는 이들도 눈에 보인다. 저항을 해야 하는 구체적인 상대, 보이는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전혀 다르게 짜여져 있다. 여기서는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이 더이상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이 권력은 통제적인 지배 때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구체적인 상대가 없고, 자유를 억누르는 적, 저항해야 할 적이 없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받는 노동자로부터, 스스로를 경영하는 자유로운 경영자(자기-경영자)를 만들어 낸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은 자기 스스로와의 내적 싸움으로 변화한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한다. 사회가 아닌 자신을 문제로 여긴다.   

 

굴복된 주체는 자신이 굴복당하고 있다는 점조차 모르고 있다.

 

큰 힘을 들여가며,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규칙과 금기로 옥죄는 통제적 권력은 비효율적이다. 본질적으로 더 효율적인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배관계에 종속하게끔 만드는 권력 기술이다. 이 권력 기술이 가진 특별한 효율성은 이것이 금지와 박탈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호와 충족을 통해 작용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 기술은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대신에 의존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진 이 효율성 논리는 감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에는 사람들은 인구조사에 강렬히 반대하였다. 심지어 학생들도 거리로 몰려 나왔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 이것이 혁명의 종말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직업, 학력 또는 일터까지의 거리와 같은 필수적 기입 내용들은 거의 우스울 정도로 여겨진다. 국가가 시민들한테서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정보를 빼앗아 간다고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나갔다.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이 발가벗어 노출하고 있다.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느끼는 자유다. 인구 조사에 저항하던 시대와 달리 우리는 좀처럼 감시에 저항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발가벗기는 자유로운 착취와 똑같은 효율성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 역설적 상황을 미국의 개념 예술가 제니 홀처는 진실주의(truism)’로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

 

눌러앉히는 권력유지하는 권력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은 오늘날 스마트하고 친근한 형태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보이지 않게 되며 잡을 수 없게 된다. 굴복당하는 주체는 여기서 굴복당하고 있다는 점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굴복당하는 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잘못 믿고 있다. 이 지배 기술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저항을 중화시킨다. 자유를 억누르고 공격하는 지배는 안정적이지 않다. 신자유주의 지배가 안정적이고 모든 저항에서 면역되어 있는 까닭은, 그것이 자유를 억누르는 대신 자유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빠르게 저항을 자극하지만, 자유를 이용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아시아 위기 이후 남한사회는 마비되었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남한 국민들에게 돈을 꾸어 주었다. 그 댓가로 정부는 저항에 폭력적으로 맞서 가며 신자유주의 어젠다를 관철시켜야만 했다. 이 억압적인 권력이 자주 폭력을 쓰는 눌러앉히는 권력이다. 하지만 눌러앉히는 권력은, 신자유주의 지배에서 심지어 자유라고 자처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과는 다르다. 나오미 클라인은 남한 또는 그리스의 재정위기와 같은 재난 이후의 사회적 충격 상태가 사회를 폭력적인 방법으로써 근본적으로 다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남한에는 좀처럼 저항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우울증과 번 아웃(Burn Out, 소진)에 대한 커다란 순응과 공감대가 만연돼 있다. 남한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자기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외부를 향한 공격은 자신을 향한 공격 앞에 힘을 잃고 있다.

 

오늘날 하나의 세계적 저항 혁명의 군중으로 일어설 수 있을 만한, 서로 협조하고, 얽혀 있는 다중(멀티튜드)은 없다. 오히려 홀로 고립되고 개별화된 자기-경영자라는 고독인(솔리튜드)이 현대의 생산방식을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기업들이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기업 내부에는 반대로 연대가 가능했다. 오늘날에는 개개인이 서로 경쟁한다. 이는 기업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절대적인 경쟁은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지만, 연대와 공공의식을 파괴한다. 지치고, 우울하고 개별화된 개인들로부터는 혁명대중이 형성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를 마르크스적 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내부에는 그 유명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Entfremdung)’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완전히 소진(Burn Out) 될 때까지 병적 쾌감으로 일에 파 묻힌다. 번아웃 증후군의 첫째 단계가 바로 병적 쾌감이다. 번 아웃과 혁명은 서로를 배제한다. 따라서 다중(멀티튜드)이 이 기생적인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사회를 세울 것이라는 믿음은 오류다. 

 

나눔의 경제는 삶의 완전한 상품화로 이어진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어떠한가? 어디서나 나눔(Sharing)과 공동체(Community)를 신봉하고 있다. 나눔 경제가 소유와 점유의 경제를 대신할 것이라고 한다. “나눔은 돌봄이다”, “나눔은 치유다라는 말은 데이브 에거즈의 소설 <써클>(The Circle)에서 써클인들이 내세우는 원칙이다. 써클 회사 본사로 가는 길에 덮여 있는 길바닥에는 공동체를 찾아 나서라또는 참여하라라는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원래는 돌봄은 죽임이다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택시 기사로 만드는 디지털 차량 공유 센터 (Wunder Car)도 이 공동체 아이디어를 가지고 홍보한다.

 

하지만 제레미 리프킨이 최근 저서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나눔 경제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유도하여, 세계적인 공동체 지향의 사회, 다시 말해 나눔이 가짐보다 더 가치 있는 그런 사회를 이끌어내리라고 믿는 것은 오류다. 그 반대로 나눔 경제는 결국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상품화하게 될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칭송하는 소유로부터 접근에로의 전환은 우리를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돈이 없는 사람은 나눔에로 접근도 할 수 없다. 접근의 시대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어 있는 수용소에 살고 있다. 모든 개인 주거공간을 호텔로 바꾸어 주는 커뮤니티 시장 에어비엔비(Airbnb)는 손님에 대한 환대마저도 상업화시킨다. 공동체 또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이념이 공동체를 전부 자본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목적없이 베푸는 친절함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서로 평점을 주고 받는 사회에서는 친절함도 상품화된다. 더 나은 평점을 받기 위해 친절해진다. 협조적인 경제의 한복판에서도 자본주의의 딱딱한 논리가 팽배한다. 이 아름다운 나눔에서 역설적이게도 아무도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내놓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시점에 완벽해진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 이것이 혁명이 맞이할 종말이다.

 

한병철/베를린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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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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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_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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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한 사람보다 한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난겨울, 저는 네팔에 있었어요. 바람이 시작되는 곳 묵티나트에서 포카라까지 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야크를 키우는 집에 들어가 질 좋은 치즈를 사 먹기도 하고 11월에 핀 꽃들을 구경하면서 걷는 여행이었죠.

매일 산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마지막 날이었을 거예요. 길을 안내해주던 네팔인 수잔이 일행 모두를 불러 세웠어요. 수잔은 5분 뒤에 재미있는 것을 알려줄 테니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돌멩이 하나씩을 주우라고 했어요. 우리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돌을 하나씩 주웠습니다. 5분 후 도착한 곳은 경사가 가팔라 사람이 내려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저 멀리에 반토막난 나무가 있었고 댕강 잘려나가 평평해진 부분에는 여러 크기의 돌들이 쌓여있었답니다. 수잔은 돌을 던져서 그 부분에 안착시키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들은 차례차례 돌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그중 저만 안착에 성공. 그대로 눈을 감고 시인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네팔의 좋은 기운 덕분이었을까요. 오늘부터는 제가 쓴 시를 더 이상 혼자만 읽지 않아도 되네요. 이제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나서 며칠간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제주에서 김포를 오가는 비행기를 몇 번 탔어야 했는데요. 그 안에서 잔뜩 겁을 먹어야 했답니다. 이 멋진 소식을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는데 비행기가 추락해버릴까 봐서요. 만약 추락한다면 휴대폰의 비행모드를 해제시키고 몇몇 사람들에게 나의 당선 소식을 반드시 알리고 죽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이병률 선배님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황인찬 선배님, 김동영 작가님. 그리고 제주에서 만난 친구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시를 위해 제주에 머물 것 같아요. 가끔씩 제주가 아닌 곳에 다녀오고 싶을 땐 기꺼이 다녀올 거고요. 그곳이 동남아든 유럽이든, 어디든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낯선 것들이 풍부한 공간에 있어야, 제게 시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원하

1989년 서울 출생

연희미용고 졸업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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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이제야 발견한다는 건,

이 시에 이제야 눈을 돌리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몸에 새기면서 썼겠다는 생각이 잠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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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에게

                              

                                            _ 최영미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난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머니가 털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쳤 댔다.

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꺾었다.

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인 없는 꽃밭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 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

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티는 계속되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때로 싸우고 때로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세기말, 제기랄


                                       _ 최영미

 

잔치가 끝난 뒤에도 설거지 중인

내게 죄가 있다면,

이 세상을 사랑한 죄밖에.

 

한 번도 제대로 저지르지 못했으면서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

 

비틀거리며 가는

세기말, 제기랄이여.

 

 


 

인간의 두 부류


                                          _ 최영미

 

공격수는 골대를 향해,

수비수는 골대를 등지며 서 있고

공격수는 한 골로는 부족하지만

수비수는 득점을 못 해도 실점이 없으면 만족한다.

 

먼저 경기장에 나서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나는

전 세계와도 맞서 싸우는 수비수가 되련다.

 

 


 

정의는 축구장에만 존재한다


                                                     _최영미

 

나는 이 날을 기다려왔다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풀처럼 강인한 그들

호나우두 아이마르 제라드 그리고 박지성

너희들을 우리는 기다려왔다

컴퓨터를 끄고 냄비를 불에서 내리고

설거지를 하다 말고 내가 텔레비전

앞에 앉을 때,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떤 소년도

총을 내려놓고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몸은 움직이고 뛰고 환호하기 위한 것,

서로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며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최선을 다한 패배는 승리만큼 아름다우며,

최고의 선수는 반칙을 하지 않고

반칙도 게임의 일부임을 그대들은 내게 보여주었지

그들의 경기는 유리처럼 투명하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어느 선수가 심판의 눈을 속였는지,

수천만의 눈이 지켜보는 운동장에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으며

위선은 숨을 구석이 없다.

진실된 땀은 헛되지 않을지니,

정의가 펄펄 살아 있는

여기 이 푸른 잔디 위에 순간의 기쁨과

슬픔을 묻어라.

 

Posted by 익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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